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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홈지기  2009-03-20 22:48:05, 조회 : 7,599, 추천 : 87

   기여천군 일대는 고려말부터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왜구의 침략을 수 없이 받아온 곳으로 조선 건국초부터 군사상의 중요한 곳임을 인식하고 태조 5년 (1396년)에 진례만호진(進禮萬戶鎭, 삼일)과 돌산만호진(화양면 용주리)을 동시에 설치하게 된다. 진례만호는 세종 5년(1423년)에 내례포(內禮浦, 여수)로 진영을 옮겨 방답첨사진(防踏僉使鎭)을 설치하였다.
  성종 10년(1479년)에 전라관찰사 밑에 전라좌수영을 설치하여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임진왜란 당시는 이순신을 정점으로 국난극복의 주역이 되기도 하였다. 영조 원년(1725년)에는 여수더호부가 설치되어 전라좌수사가 겸임을 하여 행정상으로는 순천도호부에서 분리되었다. 영조 2년(1726년)에 여수도호부가 폐지되고 고종 32년 (1895년)에 수군통제영이 폐지되었으며 순천군에 속하였다가 1896년 돌산군이 설치 관장, 1897년 여수군이 설치되었다.
  남면은 체도(體島)인 금오도가 봉산(封山)이 되어 기록이 적으나 수집된 사료를 통하여 어느정도는 알 수 있다. 난중일기에는 금오도에 몰래들어와 살면 처벌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봉산제도가 엄격하게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는 금오도가 방답진 소속으로 전라좌수영과 방답진의 규찰을 받아오다가 나중에 방답진이 맡아서 관리해온 것을 알 수 있다. 주민들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횡간도에 잠수군이 상주하면서 진상을 하기 위하여 전복을 잡았으며, 안도의 상산과 심포망산에는 방답진 봉화의 전진기지인 봉화대가 있어 봉화대를 지키던 군인들이 막개에 막을 치고 살았다.
화태도의 지명 역시 규장각 소장 전라도 순천 방답진 지도에 보면 병마장터가 있어 나발도와 함께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신호를 보내던 군인들이 상주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남면 지역에 주민이 거주했음을 증명해 주고 있는 정확한 기록은 정조 13년(1789년)에 발간된 호구총수(戶口總數)로 여수면(呂水面)에 보면 호수가 1,217호, 인구가 남자 1,660명, 여자 1,628명, 소속리가 17개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속에 횡간도와 안도, 소리도, 두리도, 수태도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불무골, 관철수, 쫓치막터 등의 지명으로 보아 왕실의 사슴의 관리와 사냥을 위한 일부의 사람들이 기거한 흔적을 보이고 있따. 금오도의 봉산은 심장리 심포에 귀양살이를 했던 이주회의 주청으로 서기 고종 22년(1885년) 을유년에 허민령을 반포하여 일반인의 입주가 시작되었다는 설과 경복궁을 중건할 때 수백주의 나무를 벌목하였는데 그 해 가을에 태풍이 불어 큰 나무에 의지해 있던 작은 나무들이 쓰러져 섬이 황폐해지자 허민령을 내렸다는 설이 있따.
  1896년(건양원년)에 돌산군이 설치되어 금오면(金鰲面)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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