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죽거리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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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명경지수 조회 26회 작성일 05-03-05 13:54본문
언제나 그랬 듯이 반가움이 앞서고 시공은 훌쩍 30년을 지나 그곳에 머
물고 있었다.
색바랜 교복들을 입고 그자리에 수업을 받고 분석하고 웃음으로 승화
시켜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의 생이 외롭지 않고 마음들이 따뜻한
삶을 이룰수 있다고 믿었다.
경계가 없는 격조있고 자유로움이 넘치는 대화를 나눈 다는 것은 유년
시절이란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건 우리들 만이
가질수있는 영역이며 성역이기도 하다.
참으로 아름아름 닥아오는 추억들은 오염되어가는 현대의 물질문명의
잔영을 씻어내는 청량제가 되어 영혼을 맑게 해줄것이다.
강구에 대한 분석-
삐비치기에 대한 복기-
낭장망과 오시깨의 차이-
빼깽이와 벤또-
꽁보리밥의 8:2 이론-
스캔들과 첫사랑-
한없이 웃고 말 그대로 배꼽빠진줄 알았다.
어떤 삶이든 소중하게 여기며 열심히 살아가는 4회 동문들이 너무 자
랑스럽다. 다들 만선 하게나 ---
댓글목록
<span class="guest">소공</span>님의 댓글
소공 작성일<span class="guest">다사</span>님의 댓글
다사 작성일<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span class="guest">공명</span>님의 댓글
공명 작성일
강구 !
바다 벌레다
뭍의 바퀴벌레와 생김이 비슷하다
체내 부화를 한다
새끼를 품고 다닌다
그 수는 수십마리에 이른다
요즘은 그렇지않다면 생태계의 변화 영향일것이다
크기는 3-4cm, 속도는 초속 1m 정도이다
특히 앞 머리 끝에는 두개의 수염이 있다
그리고 갑각류 특유의 허물갈이도한다
이 또한 그렇지않다면 진화나 퇴화의 영향일것이다
내 기억은 40년이나 지났으니
나는 결코 강구가 징그럽거나 무섭지 않다
그들과 늘 같이 했으므로
만조때 낚시 미끼를 구하지 못하거나 하면 기꺼이 미끼가 되어준 그들이다
어떤놈은 자발적으로 찾아오기도 하는데
미련하게도 내가 그와 같은 의향을 알아차리지 못할때는 발이나 다리 등 노출 부위를 물어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들의 그런 행동을 습격이나 공격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더러 있다
물고기들도 그와 같은 그들의 희생에 감복하여
먹기를 극히 꺼린다
혹자들은 이런 결과를 물고기가 강구이깝을 싫어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한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span class="guest">공명</span>님의 댓글
공명 작성일
삐비라...
잔디의 꽃대이다
"띠"라고 불리는 풀의 꽃으로 피기전 어린 꽃순이다
주로 묘지에 많다
참꽃(진달래)을 따먹고, 찔구를 분질러먹고, 삐비를 뽑아먹고, 띠 뿌리를 캐먹고...
소시적 즐기던 나의 야생 메뉴다
소꼴을 벨양으로 걸망을 어깨에 걸고 산엘 오른다
임이 짓이겨 밟고간 진달래 꽃은 감정을 담아 훝어 먹고
서러운 꽃 찔래 새순은 가시 사이로 손가락(장미과라 반드시 엄지와 검지 사용)을 써서 꺾고
가시를 훝고 껍질을 벗기고 먹는다
미성숙한 윗부위는 떫은 맛이 날 뿐 아니라 진드기가 많기 때문에 식탐의 컨트롤이 필요하다
삐비는 알맞게 성장해야 제맛을 낸다
불록한 정도를 가지고 판단해야하는데 임산부를 기준으로 보자면 약 3-4개월 정도(?)
속이 미숙했거나 과성숙으로 패버리기 직전이면 곤란하다
대체적으로 삐비에 잎이 크게 붙은 것은 속이 부실하다
삐비치기는 고도의 테크닉이 요구되는 노름이다
삐비치기에 입문하기전 예과를 거치는데 그것이 윷놀이다
일정수의 삐비를 손에 들고 180도 정도로 손을 회전시킨 다음 바닥에 뿌려
그물 코와 같은 집을 크게 만든다음 그 공간에 들어가는 삐비의 양만큼을 상대에게서 가져오는 건전한 놀음이다
팔을 회전할때 가슴과의 이격거리는 약 50--60CM 정도가 좋다
집에 삐비를 넣을때 가급적 많이 넣기 위한 노하우로 삐비 끝에 침을 발라 밀착도를 높이는 방법이 주로 쓰이고 있다
집에 넣을 때 그 집을 구성하고 있는 삐비를 건들면 실격이기 때문에 고스톱에서 적용되는 열고 같은 무대포 자세로
임해서는 안된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span class="guest">벼리</span>님의 댓글
벼리 작성일<span class="guest">소공</span>님의 댓글
소공 작성일<span class="guest">공명</span>님의 댓글
공명 작성일
음력 2-4월에는 샛바람을 맞으며 미역을 따고
6-7월이면 후리를 했다
오영수의 단편 "갯마을" 을 보면 후리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물론 해순이도 있고 - 한번들 보시라
정치망과 낭장망은 어구(고기잡는 도구)로 그물을 쳐서 운영하는 방식으로는 둘다 정치망(定置網)이다
낭장망은 바지처럼 브이형 자루그물을 물살이 쌘 곳에 고정하여 두고 고기를 잡는 어장이다
규모면에서는 오시깨라고 부르는 정치망에 미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정치망이라고 하면 우리동네에서 처럼 오시깨를 말한다
오시깨는 오가다리, 나가시와 함께
5-60년대 금오도의 3대 어로수단이었고 도치비끼는 타지의 부자들이 운영하던 규모가 큰 어로방식이었다
지금은 마을마다 고데구리가 몇척씩 있고 삼마이를 하는 집도 있지만 말이다
오시깨에 드는 고기는 주로 멸치다
철에 따라 갈치, 삼치 등이 많이 잡히기도 하지만 메인 메뉴는 멸치다
우리가 자라면서 섭취한 칼슘은 모두 이 오시깨 멸치 덕이라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물을 자갈밭에 깔고 말리는 멸치를 강구와 치열하게 다퉈가면서 줏어 먹은 덕에 이렇게 튼튼한 관절을 갖지 않았는가
멸치 한가지 메뉴로는 질릴까봐 가끔은 고록이 섞여 있기도 했지만
지금도 멸치 중 가장 上品은 죽방렴산이고 다음이 오시깨(정치망) 멸치다
죽방멸치는 살아있는 채로 삶기 때문에 색깔이 푸르고 자세가 일자로 곧다
뼈대 있는 가문의 멸치는 곧게 죽는다 '꿇느니 서서 죽는 길' 을 택했던 장수들과 같이
오시깨는 포구 입구의 양끝을 이용하여 어장을 고정하여 설치(어장을 막는다)해 놓고 고기를 잡는다
대체적으로 선창에서 약 500-1000m 정도 떨어진 위치가 된다
물은 두대의 배가 나가 본다(그물을 끌어올려 고기를 건져내는것)
큰배(모선) 두척에 작은배(전마선, 우리섬에서는 뗏마라고도 함) 한척이 동원되는데 작은배는 어장에 매어두고 큰배만 왔다갔다 하기도한다
하루에 두번 물을 본것으로 기억되는데 한번 보는 곳도 있다함
선원은 그 동네 사람들 이었고 집안 일을 하면서 종사했다
그 들이 그물을 당기면서 질러대던 압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그 소리 크기에 맞춰 높낮이를 조절하며 떼지어 떠있던 갈매기도...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
공명님
백과사전도 이렇게 세밀하게 설명을 못해줄 것 같네요. 세상에…
기억만으로 충분할 수 없는 공명님 말씀을
이대로 묻어두기엔 너무도 아깝습니다.
따로 편집을 해서라도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잘 보존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바로 연상할 수 있는 풍경이
기억 속에 충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을 더 많이 기다리며…건강을 빕니다.
벼리님 덕분에 아주 잘 있습니다.
제가 얼마 전 16회를 보고
이제 막 결혼을 한 신랑 신부 같이
아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이
참 이쁘 다고 했습니다.
<span class="guest">공명</span>님의 댓글
공명 작성일
고구마와 보리밥
나는 유년기에 이것이외의 곡식을 일용해 본적이 없다
다른 것은 부식이거나 간식꺼리일뿐
원래 비탈밭은 척박해서 뿌리식물은 잘 안된다
콩,조, 수수 같은 농사를 주로하는 강원도처럼 경사가 심한 밭은 비료를 주고 거름을 줘도 비만 오면 다 쓸려내려
비옥해지기가 어렵다
하물며 섬이야 척박할 수 있는 조건에 부족함이 없다
그 까그막을 밀어올려 밭을 만들고 산은 상고머리를 한 채로 퇴비를 삭혀 밭으로 내려보내고 있다
그 밭을 개간하면서 쏟아져 나온 돌맹이는 집과 밭의 담벼락이 되어 바람을 막고, 길의 축대가 되어있다
날카로운 곡괭이도 잘 들어가지 않는 괴질 땅을 우리 조상들은 호미와 짜구로 개간을 했으리라
우리가 빼깽이를 통해 궁핍을 말하고자하지만 그 분들은 톳과 물곳으로 보릿고개를 넘겼다
이모작을 했다
밭은 고구마와 보리를, 논은 벼와 보리 또는 밀을
요즘에 비해 소출은 왜그리 적었는지
가을에 캐는 고구마는 일단 겨울 양식으로 두지(뒤주)에 저장한다
두지는 맨아래와 옆에 기둥을 세워 틀을 잡고
세로방향으로는 강냉이대나 대나무로 짠 발을 세우고 가로로는 적당한 간격으로 팔뚝만한 굵기의 나무를 서너개 받친다
어떤 집은 야외에 무우구덩이처럼 땅을 깊게 파고 저장을 하기도 했다
저녁때 속이 출출하면 생으로 깎아 먹기도 하고 아궁이 잔불에 구워먹기도한다
생으로 먹기엔 조금 얼은 놈(동상걸린 놈)이 달고 맛있는데 고구마 캐다가 남겨진 이삭 중에 언 고구마가 더러있어
이를 캐러 다니기도했다
언고구마 캘때의 노하우는 밭의 제일 윗 부분과 같이 구석진 곳, 즉 훌쟁이가 닿지 못하는곳이 명당이다
그 두지에 저장한 고구마로 봄을 넘겨야하는데 그 안에 떨어지면 보릿고개를 겪어야했다
보릿고개때 가장 좋은 음식은 빼갱이 고은것이고, 두번째가 쑥버무리고, 세번째가 풀대죽이고, 네번째가 톳밥이고,
다섯번째는 물곳 고은 것이고, 마지막이 송피등이다
빼갱이는 생고구마를 칼로 또는 빼깽이뿌는 기계(절간기계)로 얇게 썰어 말린것이다
이것은 주로 소주주정용으로 공판을 통해 공동 수매를 해갔다
당시 가마니당 가격이 천원(?)
아무튼 일반가정에서 돈으로 바꾸는 유일한 곡식이었다
이때 식용의 빼갱이도 함께 만드는데 그 과정은 약간 판매용과 달랐다
씻어서 손으로 썰고 깨끗하게 말린다
주로 도단집, 스레트 지붕이나 바위에서 말린다
바위에 말릴때는 새벽일찍 바지게에 지고 서둘러야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봄 도시락은 빼갱이다
차라리 보리밥보다 나았다
반찬이 없어 국물 흐를일 없고 엎드려 숨겨먹지 않아도 되고
더 좋은 것은 거래가 편하다
주기도, 얻어 먹기도 그리고 점심시간까지 갈것도 없이 시와 때에서 자유롭다
빼갱이는 그 크기(면적 기준)에 따라 집안의 형편정도가 드러난다
찐 것을 기준으로 크고 색깔이 짙고 부드러워야 상품이다
사카린을 쳐서 찌면 이런 색깔과 물렁함이 나온다
일반 빼갱이는 통상 밥할때 그 위에 바로 얹어 찌는데 사카린을 넎은 것은 양푼에 담아 얹는다
물론 둘다 찌기전에 10여분 정도 물에 담구어 불려야 쉽게 익고 연하다
학교에서는 물 주전자만 잘 관리해도 빼갱이를 얻어먹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 음식엔 반드시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뒷 샘까지 갈 정도로 여유롭지 못하다
물론 게중에는 되새김질을 하듯 씹어 입안 옆 볼테기에 저장을 하면서 먹는 친구도 있긴 했지만
빼갱이 밴또를 싸가는 날은 항상 배고팠다
<span class="guest">웃찾사</span>님의 댓글
웃찾사 작성일<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span class="guest">고향사랑</span>님의 댓글
고향사랑 작성일<span class="guest">닉네임 잠시 빼기고...</span>님의 댓글
닉네임 잠시 빼기고... 작성일<span class="guest">남면사랑</span>님의 댓글
남면사랑 작성일<span class="guest">고향사랑</span>님의 댓글
고향사랑 작성일<span class="guest">공명</span>님의 댓글
공명 작성일
2:8 법칙은 경제학에서 쓰는 이론이다
이탈리아 출신 경제학자 "파레토"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중요소수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즉 2할이 8할을 지배한다는 논리다
예를 들면 백화점 매출의 80%는 20%의 사람이 올린다, 한국의 땅 80%를 20%의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 금오홈페이지
방문자중 80%는 게시 내용의 20%정도만 본다 - 이런 것이다
꽁보리밥
보리로만 지은 밥이다
지금이야 별식이네 건강식이네 하며 즐겨먹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
꽁보리밥은 음식이상의 의미를 갖고있다
가난과 궁핍의 대명사지만 더 쓸쓸한건 그 가난과 궁핍이 꽁보리밥을 통해서 읽혀졌다는 점이다
꽁보리밥은 부끄러웠고 가난도 부끄러웠다
도시락을 의자에 놓고 엎드려 먹거나 책상위에서 먹더라도 도시락 뚜껑으로 가리고 먹었다
점심을 먹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부끄러움을 먹었다
그것도 청운의 뜻을 세우던 학교라는 공간에서 말이다
지난했던 세월이었다
약 20% 정도의 애들이 쌀이 섞인 도시락을 가져왔고 그 쌀의 비율 또한 20%를 넘지 못했다
우린 그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와신상담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뭍으로의 도약과 바다와의 결별을 결심하는데는 꽁보리밥이 동인이 되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새벽마다
어머니는 절구통(도구통)에서 보리방아를 찧었다(보쌀을 한다고 했다)
보리찧는 기계(정미소)가 들어오기전에는 손으로 보리 껍질을 벗기는 이과정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했다
절구(도구대)를 사용해서 찧어 대략껍질이 벗겨지면 물을 붓고 돌맹이(갱돌)로 북북 씻는다
그것을 살짝 삶아 꺼내서 통풍이 잘되는 큰소쿠리에 담아 두고 점심, 저녁까지 세끼용으로 사용한다
(이것이 보쌀하는 과정이다)
꽁보리밥은 쉽게 쉰다
꽁보리밥은이 식으면 워글 거린다(서로 붙지 못하고 톨이 각기 논다)
쌀밥과 달리 보리밥은 보쌀하는 과정이 더 필요했고 찰기가 없어 밥하는데도 기술이 필요했다
처녀들이 마실을 나와 밤을 새워 놀다가 보쌀할 시간에는 반드시 귀가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리몽댕이가 부러지거나
무슨 수가 났다
당시 도시락은 반찬통이 벤또안에 들어있는 구조라 반찬 국물과의 전쟁을 치뤄야했다
꽁보리밥 도시락에 반찬국물이 흐르면 밥이 부스러지거나 쉬이 쉬어서 낭패를 본다
그래서 도시락 보자기에 싸서 반듯하게 들고 다녔다
그렇게 해도 항상 국물이 흘러 수건에 얼룩을 남겼다
책상 서랍에 둔 밴또에서 나는 반찬 국물 냄새는 수업 내내 코를 어지럽혀 학문 집중도를 떨어뜨렸다
계량화할 수는 없지만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꽁보리밥은 방귀의 생산량을 증대시킨다
인간의 일일 방귀 분출량은 400cc, 횟수는 15회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꽁보리밥은 그의 3-4배 정도에 이른다
양과 횟수 뿐 아니라 유독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방귀의 주성분은 메탄과 유황이다
메탄이 무엇인가 우리가 가정 연료로 쓰는 도시가스의 주성분이다
유황은 무엇인가 성냥의 화약이다
폭발성과 독성을 모두 가졌다(폭발 범위가 유황은 2%, 메탄은 5-15% 정도다)
얼마나 위험한 물질인가
특히 이 물질은 물에 용해되지 않는다(실제는 3% 정도 용해됨)
그러니 해수욕장에서도 대책이 없다
가스의 특성상 공기보다 비중이 가볍다 그렇기 때문에 분출구를 기준으로 위로 올라온다
방귀의 속도나 소리는 분출구의 유로에 영향을 받는다
분출구가 작을수록 속도는 빠르고 소리는 분출 속도와 분출구의 끝부위의 모양에 영향을 받는다
가스의 특성과 분출구와의 관계로 보면 분출자의 뒷 자리가 가장 위험하다
물론 분출구의 방향을 인위적으로 좌나 우로 조정한다면 다르다
방귀는 배출해야한다
몸 속에 황화수소가 장기간 체류하면 간장기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방구쟁이
그것은 한 인간의 간장 기능이 어찌되어도 알바아니라는 이기적인 잣대의 산물이다
몸을 보호하는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한다
그 용기가 없어 인내하며 기체를 잘게 가루내던 이들은 아마도 건강을 잃었을 것이다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의 그 고통, 그 긴장 , 그 스트레스... 얼마나 형극인가
방귀는 육체의 건강을 반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