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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 B는 싱그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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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종희 조회 418회 작성일 23-01-27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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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 B는 싱그럽게


             

티를 잘 내지 않는 것도 장점이라고 부추기며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가 걸어둔 최면일 뿐, 내가 모르는 사이 나의 얼굴빛은 가라앉고 목소리는 유리조각이 섞여 있었다.


그걸 알아차리고 정비하기까지 나에게 익숙했던 모든 마음을 떼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려놓기로 다짐하고부터 이상하리만치 다양한 감정의 빛깔이 흐려졌다.


방문객이 많을 때마다 제주도 날씨가 그래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두 계절이 어떤 경계도 없이 울부짖다가 해맑아지는 기복이 실감 나게 표출되어도 결국엔 언제 그랬냐는 듯 등을 보이면 남겨진 풍경은 왜 그리도 가슴에 잔물결을 일게 하는지...


그리 나쁘지 않던 일기예보가 급변하는 상황에서도 브레이크는 밟지 않았다. 다만 제 날짜에 돌아오지 못할 것을 각오하며 준비한 플랜 B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면, 가벼운 모험은 미지의 첫걸음이란 은근한 기대심마저 부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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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불안한 예감도 막상 제주도 12번 국도를 달리다가 보면


 "그쯤이야~ 올 거면 오라지~

이제 우리는 제주도 바다 빛에 젖고 말 테요!~"


만약에 이런 탄성이 저절로 나오지 않는 나그네가 있다면 짐 속에 육지의 그늘을 꾸역꾸역 넣고 와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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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유순한 설렘도 마지막 날 밤 다급하게 날아온 한 통의 결항 문자로 끝이 났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이란, 날이 새면 공항으로 직행해 티켓을 다시 예매하는 일이었다.


밤새 내린 폭설로 도로가 거의 차단되었다는 문자를 비집고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95번 국도는 신이 내린 선물 같았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앞차가 눈발에 희미해질 때면 살짝 고립의 공포가 몰려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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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천 수 만의 화살촉으로 날아온 눈발이 일제히 차 앞 유리창에 꽂히는 것도, 바닥에 겨우 몸을 누운 눈들을 대패질해서 다시 하늘로 밀어내는 일도, 바람의 소행인 걸  뻔히 알지만, 인간은 여적 바람을 제압하는 방법을  찾지 못해 고개를 숙일 수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쩌면, 우도 어느 식당 보말국수를 먹고 난 후, 그 많은 관광객 앞에서 음식값을 깎아달라는 말이 통하지 않자, 왜 불친절하냐고, 주인의 말투에 꼬리를 잡던 손님도,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친절하고 싶어도 친절할 수가 없어요!" 

통쾌하게 한방의 펀치를 날리던 주인도, 

저 바람에게만은 숙일 고개가 있을 것이다.


이른 시간인데도 공항은 빼곡했다. 단체 예매가 힘들면 각자 흩어져 돌아가기로 결정을 했는데 한참 동안 서있던 딸애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돈의 위력은 참 대단했다. 제주에서 돌아오는 티켓이 비즈니스석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그걸 예매하고 온 덕에 하룻밤만 자고 나면 가족 모두가 함께 돌아갈 수 있단다. 그 난리 통에서도 다과를 즐기며 넉넉한 소파에 기댈 수 있는 대기실이 다 있다니...... 

불현듯 다시 일을 해야겠다는 욕구가 솟구친다.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더 많은 인파로 가득한 공항을 뒤로하고 우린 '플랜 B' 접속 키를 눌렀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는 일, 

노트북을 들고 온 아들을 카페에 남겨두는 일, 

전날에 미리 예약해 둔 호텔로 돌아와

푸지게 낮잠을 자는 일......

 

깨어보니 다시 저녁시간, 

피곤과 긴장이 한꺼번에 풀려서 그랬는지 흑돼지 구이 안주에 소주 맛이 기가 막혔다. 아이들까지도 술 술 땅겼는지, 그때까지 별 얘기 하지 않던 아들이 지난해 노력했던 결과를 진지하게 털어내며 올 1년은 휴학을 한단다.


서로 바빠 자리를 채울 수 없었던 가족이 눈바람에 갇힌 덕분에 오랜만에 마주 보며 벙근다. 


제 길을 묵묵히 개척해 가는 아이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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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오아시스님의 댓글

오아시스 작성일

가족과 좋은 하루가 더 값지네요~~^^♡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그 섬에 가면 흩어질 수가 없어요 ㅎㅎ
감기 조심하세요 ♡

<span class="guest">겨울눈</span>님의 댓글

겨울눈 작성일

이게 어케 무슨 플랜비?
에이보단 낫구만
더 휴가를 즐긴세미네요.
자랑이구만요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A는 더 좋은데
싱그러운 B를 위해 참았어요 ㅎㅎ
오늘도 행복하세요 ^^

<span class="guest">산적두목</span>님의 댓글

산적두목 작성일

삶에서 정해진 길로만 다닐 수 없다면
'즐겨라' 라고 편하게 말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가슴에 짐덩이를 보듬고 편하지는
않았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글 한편 건졌으니
이 정도면 남는 장사라 할 수 있겠네요.
아이들과 소통은 덤이고...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산전두목님 답글을 읽고
문장 하나를 얼른 바꿔치기했습니다 ㅎㅎ
저마다 다른 색채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지만
저는 지금 여적 누려보지 못한
푸른 날들을 만난 것 같습니다 ㅎㅎ
글 한편 건졌다는 말씀도 추가되어요
알게 모르게 돋보기의 응시는
두렵기도 하고 쫀득하게도 합니다
새해에도 건강, 건필하세요
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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