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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이전의 금오열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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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남면지 조회 274회 작성일 23-12-16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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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안섬지

 남면 지역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 정확이 밝혀지지 않았으나유적과 유물을 통해 볼 때 신석기 시대부터로 알려져 있다유적과 유물의 발견 장소가 곧 취락의 위치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적어도 그것이 발견되는 장소 가까이에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권이 형성되었을 것이다때문에 기록이나 문헌이 있기 이전인 선사 시대의 취락은 지표 위에서 남아있는 유물·유적을 통해 분포지의 배치 상태를 파악하고당시의 생활권과 문화 발달의 단계생활환경 등에 대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신석기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 조개더미를 들 수 있다세계사나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신석기 시대에 이르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면서 한 곳에 눌러 사는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그 유적지는 주로 강가나 바닷가에 분포하고 있다.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음에도 조개더미가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이 되는 것은 수확한 곡식만으로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이를 보충할만한 음식 재료가 필요했는데빠르게 움직이는 어류보다는 움직임이 둔하거나정지된 조개를 잡는 것이 쉬웠으므로이 시기에는 조개가 일상생활에서 곡식을 보충할 수 있는 식재료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조개는 살만 먹고 껍질은 버리는데그 장소는 살던 곳 주변이나무너진 움집 등이었다조개껍질은 점차 쌓이고 쌓여 층을 이뤄 조개더미를 만들었을 것이고오늘날 이를 발굴했을 때 당시 사람들이 살던 집의 형태를 알려주기도 하고사용했던 도구 등을 통해 삶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게 해 준다.

1994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는 당시 여천군에 속한 섬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조개더미 유적을 조사하였는데남면 지역에는 대횡간도·금오도·연도에서 각 1화태도와 안도에서 3곳씩 모두 9곳의 조개더미 유적을돌산 세구지 유적이란 책을 통해 학계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주로 땅 위에 흩어져 있었거나흙과 함께 깎인 조개더미 등에서 주운 토기와 흑요석 조각과 같은 유물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2007년 안도 조개더미 유적이 발굴되면서 남면 지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서·남해안중국과 일본과의 교류까지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출토되었다.

토기 외에도 통일 신라 시대 남면의 취락과 관련된 자료로 일본의 승려 옌닌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들 수 있다.

중국 당나라의 불교를 배우기 위해 선발된 일본 승려 옌닌(圓仁, 794864)은 838년 6월 13당나라에 파견될 사신의 배를 타고 하카타만을 출발하여 귀국할 때까지 9년 이상을 여행한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이 책이입당구법순례행기이며, 847년 9월 6일부터 8일까지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오전 10시가 되려고 할 무렵 안도(雁島)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이곳은 신라의 남쪽 땅으로궁궐(內家)에서 말을 기르는 곳이다동쪽 가까이에 황룡사의 장원이 있으며띄엄띄엄 인가(人家두세 군데가 보인다서남 방향에는 멀리 탐라도가 보인다.

 

위 기록에서 옌닌 일행이 잠시 쉬었던 안도(雁島)는 지금의 남면 안도(安島)로서당시 국가에서 말을 기르던 목장이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띄엄띄엄 인가 두세 군데가 보인다.”고 하여 취락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삼국사기경애왕(景哀王) 4월조와고려사태조 10년 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경애왕 4년 4강주(현재 경상남도 진주소관 돌산 등 4고을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태조 10년 4해군 장군 영창과 능식 등이 해군(舟師)을 이끌고 강주를 비롯해 전이산노포평서산돌산 등 4향을 공격했는데포로와 물자는 다시 돌려보냈다.

 

이 두 기사는 경애왕 4년과 고려 태조 10년인 927년의 일로서 하나의 사건을 의미하고 있는데고려가 돌산 지역을 공격했음을 알 수 있으며돌산과 가까운 남면 지역도 해당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 남면 지역에 사람이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근거는조선왕조실록등 다양한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먼저임진왜란이 끝난 약 20년 뒤인 1617년 쓰인광해군일기에는 조선시대 화태도에서 항암제이자고혈압 치료제 등의 약재로 이용되었던 뽕나무 겨우살이(桑寄生)가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남면 지역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전라 좌수사 이흥립(李興立)이 내의원(內局)에 겨우살이가 다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 2근을 구하여 올려 보냈는데그 품질이 아주 좋다그러니 즉시 내의원 관원 손몽상(孫夢象)을 파견하여 살피게 하라순천(順天방답진(防踏鎭파태도(陂太島 화태도의 옛 이름인 수태도의 잘못된 표현으로 보임)에 뽕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는데겨우살이가 붙어 있는 것이 아주 적어서, 1근 반 정도만을 따서 바쳤으며이흥립 역시 2근을 채집하여 올려 보내었다.”

 

겨우살이(aLoranthus parasticus Merr.)는 나무줄기 위에 붙어사는 착생 식물로참나무·뽕나무·밤나무 등에 뿌리를 내려 물을 흡수하며 살아간다하지만겨우살이는 엽록소를 갖고 있어 자체에서 탄소 동화 작용을 통해 영양분을 만들 수 있으므로숙주 식물한테서는 물만 공급 받는다.

겨우살이는 새들을 통해서 번식하는데여름철에는 다른 식물의 그늘에 가려서 햇빛을 받지 못해 자라지 않고 있다가나뭇잎이 떨어지고 나면 꽃을 피우고 겨울 동안에 구슬처럼 생긴 연한 노란색 열매를 맺는다.

겨울철에 새들이 먹이를 구하기 어려울 때겨우살이 열매는 새들의 좋은 먹이가 된다이 열매에는 끈적끈적한 점액이 많이 들어 있는데 새들은 이 점액과 씨앗을 먹고 나서 부리에 붙은 점액을 다른 나무의 껍질에 비벼서 닦는다이때 끈끈한 점액에 붙어 있던 씨앗이 나무껍질에 달라붙어 있다가 싹을 틔우게 된다.

겨우살이의 맛은 쓰고 달며 성질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평()하여 간과 신장에 작용한다간과 신장에 작용하여 인체의 풍습을 제거하고 간과 신장의 기운을 보충하며 근육과 뼈를 강하게 하는 작용과 혈압을 낮추는 효과도 있다따라서 풍습의 사기(邪氣)로 인해 팔다리가 저리고 아프거나 허리와 무릎이 시리고 아플 때임신 중 자궁 출혈(胎漏), 모태 안에서 태아의 움직임(胎動)이 불안할 때 등에 효과가 있으며고혈압 약으로도 이용된다.

호좌수영지에 따르면횡간도는 조선시대 전복을 잡아 관청에 바치던 잠수군들이 살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살아 있는 전복(生鰒)은 소속된 횡간도 잠수군처에서 벼 1석에 100개와 바꾸어 쓴다.

 

살아 있는 전복 100마리와 벼 1섬과 바꾼다고 했는데조선 정부에서도 전복을 따는 일의 얼마나 힘든 일인지그럼에도 세금을 수탈함으로써 백성들의 어려운 삶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살아있는 전복을 잡으려면 몇 번을 물에 들락날락 해야만 겨우 한두 마리를 잡는데그렇게 따서 100마리를 채우기로 말하면그 고되고 쓰라린 사정과 형편은 어떻게 다 말하겠습니까그런데 이미 병영에 빼앗기고 또 왕실에서 분가한 왕자와 공주 등이 살던 집(宮家)에 세금을 내자면, 1년 내내 죽어라고 고생하여 결국은 먹고 입을 것도 남지 않으니생활이 어렵고 가난한 백성(窮民)들은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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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https://blog.naver.com/jun9129/110187611442

 

어린애 땔감하고 돌아와 뽕나무 아래 잠자니 小兒樵歸桑下睡

할미가 와서 두들겨 깨워 성내며 말하길嫗來擊起生嗔恚

이웃집 계집아이 나이 겨우 열셋이나 隣家小嬌年十三

늘 물질 다녀서 깊은 물속까지 들어간다常遊浦口能入深

너는 남자가 되어 저만도 못하면서 爾獨爲男不如彼

언제나 뽕나무 아래서 꿈만 꾸는구나長在桑下做夢裏

 

사내아이가 땔감하고 돌아와 피곤하여 뽕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이 들었는데못마땅한 할머니는 손자를 깨우면서 옆집 계집아이와 비교한다열세 살 밖에 안 되지만옆집 계집아이는 늘 물질을 다녀서 깊은 물속에서 전복을 땀으로서 집안에 도움을 주는데자신의 손자는 그렇지 못해 불만스러울 정도로 전복 채취가 중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집안 살림 언제나 넉넉해질 것이냐 家業何時有饒餘

언제 어른이 되어 칭찬을 들을 것이냐 하네何時成人聞稱譽

가련해라 누군들 자식 사랑하지 않겠는가만 可憐誰不愛其子

목숨 걸고 이런 것을 가르쳐서不愛性命而敎此

그것을 얻어 생계 삼고 得此以爲生

그것을 자랑하며 영예로 삼다니誇此以爲榮

 

빨리 어른이 되어서 전복을 많이 따 집안 살림살이에 도움을 주고칭찬을 받을 수 있지만글만 읽었던 선비에게는 물살이 아주 거센 횡간 수로에서 사랑하는 자식에게 목숨을 걸고 전복 따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를 통해 생계를 이음과 동시에 영예를 얻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머리 돌려 한 번 탄식하고 거듭 감개하노니 回頭一歎重感慨

세간의 수많은 부형들도 그 사랑을 잘못하여 世間多少父兄失其愛

부지런히 글 가르쳐 벼슬의 바다로 나가게 하네勤敎文字赴宦海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고자 하는 선비는 목숨을 걸고 전복을 따는 방법을 가르치는 부모의 사랑이 잘못되었다고 보고 자식에게 글공부를 시켜 벼슬길에 들기를 바라지만섬사람들의 생활과는 너무 동떨어진 생각이다.

1777(정조 1안도에서는 태풍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 가슴 아픈 사연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전라 감사 이보행(李普行)순천 안도(安島)에 사는 정덕수(鄭德水등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올린 보고서(馳啓)에 대해 임금이 명을 내리기를,“전라도로 하여금 백성들을 도울 수 있는 은혜(恤錢)를 베풀도록 하라.”하였다.

 

김윤식이 안도에 들러 그곳의 여성과 나눈 대화체 시안도의 여인(安島女)에서는 조선 후기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남면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다.

 

아침에 방답진을 출발하여 朝發防踏鎭

저녁에 안도리에 투숙했네暮宿安島里

풍파 속에 겨우 건너왔더니 風波僅得涉

두근거리는 마음 아직도 풀리질 않네悸恐心未弛

 

순천부에서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를 거쳐 지금의 돌산 군내리에 설치되어 있던 수군진인 방답진에서 아침에 배를 타고 안도로 출발했으나저녁 무렵에 도착했는데파도가 높아 많은 고생을 했음을 알 수 있으며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가득하다.

 

묻노니 안도의 여인이여 借問安島女

무엇 때문에 굳이 도시를 떠나何苦去城市

이 외로운 섬에 와 살면서 來此孤島居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오 하니而獨不畏死

 

글공부해서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고자 했던 선비의 입장에서는 번성한 도시(城市)를 떠나 외롭고거센 파도와 같이 위험한 요소가 많은 섬에서 살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

 

안도 여인이 웃으며 말하길 安島女笑曰

손님 이치를 잘 모르시군요客子不知理

도시에선 살 수가 없어요 城市不可居

부역 그칠 날이 없어 供役無時已

부지런히 농사지어도 먹고살기 어렵고 勤耕不自給

날마다 채찍질을 당하지요日日遭鞭箠

섬 생활도 정해진 세금은 내야 하지만 島居有正稅

일 년 내내 포학한 관리는 없지요終歲無虐使

 

대답하는 여성은 비록 섬에 살고 있지만글만 읽던 선비에게 당시의 사회적 모순즉 육지에서 생활의 어려움을 세금 제도와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는데부역(負役), 전정(田政), 탐관오리의 횡포 등을 들고 있다.

행정적으로는 순천부에 군사적으로는 전라좌수영과 방답진에 속해 있던 안도 사람들은 행정·군사뿐만 아니라 봉수대 또는 같은 기능을 담당했던 요망소(瞭望所)를 지키는 부역까지 담당해야 했다.

 

도시에선 살 수가 없어요城市不可居

자식들이 사치를 배워서 子弟學侈靡

고생하여 얻은 며칠의 양식이 辛苦數日糧

한 켤레 신발값에도 미치지 못하지요不及一緉履

섬 생활은 진실과 소박함을 지킬 수 있어 島居守眞樸

평생 화려함을 알지 못하지요生不識華美

도시에선 살 수가 없어요城市不可居

자식들이 경서와 사서를 배워 子弟學書史

해마다 한양에 과거 시험 보러 가야하는데 年年赴京擧

재산을 탕진하고도 그칠 줄을 모르지요蕩貲不知止

섬 생활은 우매함과 비루함을 온전히 하며 島居全愚陋

헤엄치기 배우는 것만 볼 뿐이지요惟看習泅水

 

도시에서는 물가가 폭등하여 미투리 한 켤레 값이 며칠 동안 고생해서 얻은 곡식의 양과 같으니자식들이 어떤 물건을 하나를 사고자 하더라도 사치에 해당하며글공부를 통해 관리가 되려고 과거를 보러 오가는 경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살기 어렵지만섬에서는 화려함을 알지 못해도 진실과 소박함을 지킬 수 있고어리석고 가난해 과거 준비를 위한 공부는 못해도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헤엄치는 것은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섬 생활이 더 낫다고 설명한다.

 

도시에선 살 수 없어요城市不可居

거짓말이 날마다 사방에서 일어난다지요訛言日四起

듣자니 현달한 관리의 집은 聞道達官家

일 년에 집을 다섯 번이나 이사 간다 하더군요一年宅五徙

섬 생활엔 난잡한 말 없어 島居無雜言

한 말 술로 서로 즐거워하지요斗酒相懽喜

 

도시에서는 조선 후기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면서 천주교와 동학이 널리 퍼져 이를 막고자 하는 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으며관리들은 백성들로부터 더욱 가혹하게 수탈함으로써 혼란해진 도시에 비해 섬에서는 술 한 잔씩 돌리며 서로 즐기니혼잡스럽지 않아 좋다.

 

도시에선 살 수가 없어요城市不可居

담 벽 안에 간악한 도둑이 산다지요墻壁棲奸宄

살인과 월담에 강포하여 두려움도 없고 殺越暋無畏

문빗장 채워도 속임수로 연다지요扃鐍啓詐詭

섬 생활은 밤에도 문을 열어놓고 島居夜開戶

늙은 삽살개는 귀 늘어뜨린 채 지내지요老尨安帖耳

 

안동 김씨풍양 조씨 등 특정한 외척 가문이 권력을 독점함으로 관직을 사고팔며백성들은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고통 받게 되자농민의 저항은 거세졌으며그 가운데 일부는 산적(山賊)이나 좀도둑(草賊)이 되어 이들도 농민들을 괴롭히지만섬에서는 그런 일들이 없으니 밤에도 대문 잠글 필요가 없고집을 지키는 삽살개도 짖을 일이 없다.

 

산속에선 살 수가 없어요山中不可居

승냥이와 호랑이가 살고 있으니까요豺虎之所倚

섬 생활엔 그런 걱정 없어 島居無此患

어두운 밤에도 개돼지를 풀어 놓지요昏夜放犬豕

강가에선 살 수가 없어요川邊不可居

강물에 떠내려가고 잠겨서 농토를 잃거든요漂沒失耘耔

섬 생활은 일정한 조수만 살피면 島居候常潮

나아가고 물러남에 궤도를 잃지 않지요進退不失軌

 

산속에는 표범과 호랑이가 살고 있어 위험하지만섬에서는 밤에도 개돼지를 풀어 놓을 정도로 안전하고강가는 홍수로 한 번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살기 어렵다그러나 섬에서는 물때만 잘 살피면 위험에서 벗어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상산에 올라 사슴을 잡고 上山捕麋鹿

숲에 들어가 봄 꿩을 쏘고 入林射春雉

조수가 물러가면 물고기를 그물질하고 潮退網魚鱉

서리 내리면 귤과 감을 거두지요霜落收橘柿

대를 이어 시집 장가를 드니 婚嫁世相襲

족씨를 구별할 필요도 없고 不必辨族氏

물고기를 팔아 곡식으로 바꾸니 賣魚以換穀

쟁기질에 얽매일 필요도 없지요不必服耒耟

 

안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상산(207m)에 올라 사슴을 잡고봄철에는 꿩을 사냥하며물때에 맞춰 고기를 잡아 곡식과 바꿔 생활함으로써 생활은 농업보다 어업에 중심을 두고 있다크게 먹고 사는 문제가 없으니지식들을 결혼시킬 수 있고섬이라는 특성이 반영되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일가친척이 된다.

 

배 안에 있으면 서재나 누각 같아 在舟如齋閣

무늬 아로새긴 비단 창문 부럽지 않아요不羨窓疏綺

서로 바라볼 뿐 왕래하지 않은 채 相望無來往

창창한 젊은이들 아치에 이르지요幼艾至兒齒

평평한 육지에 풍파 많으니 平陸多風波

고광대실인들 어찌 믿을 만하겠어요大廈安足恃

부귀란 옅은 연기와 같고 富貴如薄煙

공경과 재상은 갈대풀이나 진배없지요 하네公相葭莩視

 

배 한 척이면 고대광실이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는데,노자에 나오는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다 보이고 닭개의 소리가 서로 들리지만 백성들은 늙어 죽도록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또한 중국 송나라 때 성리학을 집대성했던 주희(朱熹)집전(集傳에서아치(兒齒)는 이가 빠졌다가 다시 나는 것으로장수의 상징이다.”라고 설명한 것처럼 욕심 없이 사는 삶이 건강과 장수의 비결이다때문에 섬사람들에게 부귀나 공명은 부질없는 것이다.

 

손님은 대답할 말이 없어 客子無回辭

저녁 물가에 서글피 서있었다네悄然立暮涘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던 선비는 안도라는 작은 섬에 살고 있는 여성에게 삼정의 문란 등 백성들의 고통스런 현실과 섬 생활이 비록 부귀영화를 누리지는 못하지만안빈낙도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을 제대로 배운 셈이다.

승평관집에는 당시 남면 지역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물고기 잡이를 구경하다라는 시도 실려 있다.

 

물고기 잡이를 구경하다(觀打魚)

 

세 척 배가 종횡으로 수면에 나타나 三船縱橫來水面

큰 그물 물에 펼쳐 주위를 두루 감싸네大網截浦圍裹遍

어부들 밧줄을 메고 먼 물가로 내려가고 百夫擔索下遠汀

배 한 척 가로로 서서 홀로 뒤를 받치네一船橫立獨爲殿

금세 그물 올리자 바람이 비린내 불어오고 須臾擧網風吹腥

옥빛 튀고 눈이 춤추며 물보라가 흩날리네玉騰雪舞飛沫濺

배는 작고 물고기는 많아 다 거둘 수 없는지라 舟小魚衆不勝收

술 마시고 북을 치며 축하연을 베푸네飮酒擊鼓排賀宴

섬사람들은 대개 물고기 중히 여기지 않으니 島人尋常不重魚

내일 하동으로 가서 내다 팔아야지明日去賣河東縣

 

남면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개맥이방그물후릿그물 등을 이용한 어업이 이루어져 왔다이 가운데 김윤식의 시와 가장 가까운 어로 방법이 권현망(오가다리)으로 보인다오가다리는 멸치를 잡는 어업으로, 4월에서 9월까지 조업을 하였다. 4척의 배가 조업을 하는데, 2척은 작업 본선, 1척은 멸치 떼를 찾는 망배, 1척은 밀땟마라는 운반선이다.

망배에는 멸치 떼를 가장 잘 찾는 선수(오끼아)가 타고 멸치 떼를 발견한 뒤신호기로 본선에 알리면 본선은 그물을 싣고 네 가락씩의 노를 빠르게 저어 멸치 떼에 다가간 뒤그물로 멸치 떼를 넓게 둘러싼다.

멸치 떼를 들러 싼 본선에는 한 척에 보통 78명의 선원들이 타고 있어 배를 육지와 줄로 묶어 고정시킨 다음노꼬리(노꼬나)를 돌려 그물을 당겨 올린다망땟마의 신호를 계속 받으며 그물을 당기다가 가까이 오면 두 배의 간격을 좁혀 맞댄 다음 멸치를 쪽지로 떠서 밀땟마에 옮겨 싣는다.

이 시에서 잡은 고기를하동으로 가서 내다 팔아야지.”라는 대목은 남면 사람들의 당시 생활권을 유추할 수 있다가까운 돌산 방답진이나 여수 좌수영의 시장을 두고 경상도 하동까지 가서 판매한 것은 구례·광양·하동의 물산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남면 지역에서 필요한 물건을 쉽게 구할 수 있었거나방답진과 좌수영의 세금 수탈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1928년 7월 21일자관 짤 나무와 큰 사슴(官材麋鹿)도 간 곳 없고생활고의 부르짖음(叫呼)만 시끄럽고 소란스럽다(騷然). - 살 곳 찾아 가니 죽음이 기다렸다금오봉산(金鰲封山) -’이라는 기사에 따르면금오도에 취락이 형성된 것을 안도의 1860년 대화재(경신 대화재)와 연관 짓고 있으며당시 금오도의 생활 모습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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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의 서북쪽에 안도보다 7배나 큰 섬이 있으니이 섬이 금오도이다오늘날 면사무소·학교 등이 있으나개척되기는 안섬보다 뒤떨어졌는데그 이유는 봉산이라 하여 사람의 거주를 금지한 곳이었으니예로부터 수목이 울창하여 아름드리나무(連抱之材)와 큰 사슴이 깃들어 서울 양반 양반들은 관을 짜는 나무(棺槨및 보신을 위한 피를 여기서 얻었다.

이 섬을 개방하면 얼마 안 되어 황폐할 염려가 있음으로사람의 거주를 엄하게 금지하였는데, 100여 년 전 안도에 화재가 일어나서 갈 곳을 잃고 풍파 속에 헤매는 안도 사람들이 죽음을 마다 않고 이곳에 들어서서 개척했다고 한다.

얼마 안 되는 특수 계급의 보신 관재 문제보다 수천 명이 죽고 사는 문제가 중요했기 때문에 그 뒤로 개방되었다살기 어려운 주변의 섬사람들도 이 무진장한 보물 창고 개방 소식을 듣고 물밀 듯 들어왔고집 지을 나무를 이 섬에서 구하여 자유로이 베게 되었다그러나 사슴도 생명이 있고 나무도 자라는 둘레가 있어 얼마 후에는 사슴과 나무도 사라져 옛날의 얼굴을 조금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무를 벨 때베는 그들은 세계에서 다시보기 어려운 큰 윷()을 놓게 되었으니수 백길 되는 절벽에서 내려 굴린 아름드리나무가 바위너덜에 부딪치거나나무 등걸에 걸쳐 바다 위에 떨어질 때는 제 몸무게 때문에 쩍쩍 갈라져서 윷짝이 되고 말았다이것을 보는 여러 사람은 이 큰 윷을 놀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고 기뻐했다고 한다.

 

김윤식이 남면 지역을 여행하면서 안도를 들렀던 때가 1860년 3월이었으니남면 지역에서경신 대화재라고 부르며, 100가구 또는 300가구 가운데 한 채만 남기고 마을이 모두 불탄 사건인‘1860년 대화재는 같은 해 그 이후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금오도는 궁궐을 짓거나 수리할 때왕족의 관()을 짜거나판옥선 등의 전선(戰船)을 만들 재료인 소나무를 기르고 가꾸던 황장봉산(黃腸封山)이었기 때문에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지역이었다금오도의 소나무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곳에 사용되었으나서울의 소수 귀족들의 관을 짜는 나무로 활용되었으며울창한 숲에서 자라는 큰 사슴의 피는 그들의 보신재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안도에서 큰 화재가 일어나 먹고살기가 어려워진 안도 주민들이 엄격히 통제하던 금오도에수 천 명이 목숨을 걸고 들어가 삶의 터전을 일굼으로써 개방되었고이 소식을 들은 가난한 주변 섬사람들이 함께 들어와 개척하였다.

하지만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와 살집을 짓기 위한 나무와 일부 사람들은 돈벌이를 목적으로 나무를 마구 벰으로써 숲이 사라지고그곳에 살던 큰 사슴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돈벌이를 위해 나무를 벤 사람들이 이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무를 절벽으로 굴려 바다에 떨어뜨려야 하는데이 과정에서 나무들이 쪼개져 윷가락처럼 변해 쓸모없이 됨으로써 금오도 사람 모두가 살기 어려워져살 곳 찾아 가니 죽음이 기다렸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http://kyujanggak.snu.ac.kr/geo)에 소장되어 있는 1872년 지방지도의순천방답진지도에는 지금의 남면 지역의 연도안도·소두라()··(·)횡간도화태(취타)도에 봉수(烽燧)의 기능을 맡았던 요망소(瞭望所)가 설치되어 있어 취락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이 지도가 그려진 시기까지 금오도(거마도巨磨島)는 황장봉산으로 묶여 있었는데, “산 정상에 오르면 동남쪽으로 일본 대마도가 보인다.”라는 기록이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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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span class="guest">금오지기</span>님의 댓글

금오지기 작성일

위 내용은
김병호 선생님께서 편찬에 참여하신 남면지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김병호 선생님께서는 금오홈 초창기 때부터 참여해 주시고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이번에도 남면지를 보내주셔서 이곳에 주요 부분을 올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미리내님의 댓글의 댓글

미리내 작성일

지금도 돌산 군내 신기 작금 어르신들은
건너다 보이는 금오도를 거무섬이라 부르더군요
옛날 숲이 우거져서 섬 전체가 검게 보였답니다.

처음부터 단숨에 눈을 반짝이며 읽어 내렸습니다.
저는 단숨에 봤지만
저 자료들을 뒤져 발췌하시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사용하셨을까요.
그 노력과 정성 감사드립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

안도 여인의 안빈낙도는
다시 읽어도 감동입니다
중간 링크해 주신 태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되었네요.
소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span class="guest">이승자</span>님의 댓글

이승자 작성일

금오도
안도
몰랐던 역사를 선생님의 소중한 자료때문에
새롭게 알게되어 금오도에 더 애착이 느껴지네요.

여러나무의 겨우살이도 다양하고요
동백나무 겨우살이는 바다의 함초모양과 비슷하게 생겨
몸에 좋다하여 물에 넣어 끓여 먹었는데

한 권의 역사책을 읽었습니다.
소중한 자료 알게되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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