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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머리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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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리찬 조회 300회 작성일 24-01-11 12:28

본문

20대의 70%를 함께 한 친구가 있습니다. 눈만 뜨면 늘 함께였습니다. 아니 추운 겨울에는 잠도 함께 잤었지요.

목소리가 참 고운 친구였답니다.

그래서 교회 성가대 소프라노의 리더는 늘 그 친구였지요.

난 고음이 안 되고 박자치인데다

목에 수술까지 하여 노래를 거의 안하고 듣는 거도 사람 목소리보다는 클래식 악기음을 더 좋아하지만

그 친구의 노랫소리는 내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 주곤 하여 노래 불러 달라고 했었지요.

야근을 해야 하는 날은 저녁밥까지 같이 먹는데 그 친구는 음식도 참 맛깔나게 만듭니다 .정지에서 둘이 먹을 밥과 된장찌게를 끓이면서도 늘 흥얼거리며 복음성가를 불렀네요.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연탄불로 데워 진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 깔고 그 속에 발 집어 넣고 나무 분쇄 후 압축하고 붙여 만든 판에 코팅하여 철로 된 다리 나사 못으로 붙여 만든 상 펴면 책상겸 밥상에 예배상도 되는 상 위에 헌책 올리고 노란 작은 양은 냄비 속에 끓인 된장찌게와 김치 그리고 고추장에 멸치 몇개 이것이 우리의 진수 성찬이었고

어려서는 못 먹던 납작 으깬 보리쌀과 쌀이 반반 섞인 쌀포대에서 퍼서 연탄불에 갓 지은 부드러운 냄비밥만으로도 우리 몸을 오동통하게 살찌웠지요.

그 때 다이어트 개념도 말도 유행하지 않을 때고 울 엄니는 배 나온 도갓집 큰 아드님같이 부해 보이는 사위가 소원이었던 때였었거든요.


그 친구따라 멀고 먼 함구미에서도 꼬불탕 좁은 산 길을 더 들어가서야 만날 수 있는 그 친구의 고향집 용머리라는 곳에 가 봤습니다.

아마도 우학리에서 2시간도 한참 넘게 걸었을겁니다.

그 때 찻 길도 없었고 함구미에서 저녁 무렵 창녕호를 타고 직포에 내려서 또 하염 없이 걸어야 우학리에 도착하는 그 멀고 먼 길을 작은 체구의 그 친구는 월 1회정도 부모님 찾아 혼자서 걷고 또 걸었었나봅니다.

난 그 친구 덕분에 금오도가 얼마나 큰 섬인지 처음 깨달았었지요.

그 친구네 집 주변엔 오래 된 동백나무숲과 나무 밑에 떨어진 동백꽃이 이뻐도 그리 이뿔수가 없었고 

북향으로 온통 돌로 만들어지고 지붕만 도단으로 덮인 작은 집 작은 방 그리고 구멍이 숭숭 뚫여 밖의 바다가 다 보이는 돌담 그 아래는 바다인 그 곳에서 태어나 중학교부터 여수 시내로 가서 자취하며 학교 다니느라 저절로 된 요리 솜씨와 늘 1등과 그 주변에만 머문 총명한 두뇌, 그런데 어찌 그리 하나님은 빨리 데려가 버릴 수 있을까요.

아이들 양육에서 벗어나

이젠 살만하고 왕래하며 예전처럼 오손 도손 살아볼까 했구마는

어느 날 서울 삼성병원에 있다며 전화가 왔습니다.

퇴원한다는데 보호자 조차 안 따라온 그 친구를 집에 데려와 

없는 요리 솜씨 발휘하여 죽도 써 줘 보고 해도 먹지 못하고 넘겨 버리는 앙상하여 더 작아 진 내 친구.

내가 사는 곳 20분 거리에 아들 군대 생활한다 해서 같이 면회도 가고 할 때는 우리 이제 자주 만나고 같이 여행도 다니자 했구마는

지 혼자 다시 못 만날 먼 곳으로 가 버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보고픈 내 친구

보고프고 보고픈 내 친구야~~~먼 훗날 내가 찾아갈테니 꼭 마중나와주면 좋겠다.




댓글목록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

서로가 너무 깊은 정을 나눌 만큼
참 소중하고 고운 친구였네요.
그 귀한 친구를 잃었을 때
어떤 마음이셨을지
친구 같은 자매
자매 같은 친구를 생각하며
슬픔의 크기를 조금이나마 가늠해 봅니다.
그 깊고 깊은 숲속의 집은,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왠지 자꾸만 그리울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span class="guest">아리찬</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아리찬 작성일

그 친구 떠나고 딱 한번 그 곳 친구의 옛 집을 찾아갔답니다.
산천은 유구한데 인적은 간 곳 없어라를 실감했습니다.
빈 집에 깨진 독이 있는 장독대와
다 삭아가는 덕석이랑 돌담 아래 우거진 잡초며 예전 여기가 아침이면 부산하게 등교 준비하고 친구와 부모님들이 사셨던 곳이라는 내 가늠 뿐이었어요.
한 발짝만 담장밖으로 나오면 개도랑 월호랑 섬들이 보이고 몇 걸음 더 나오면 낭끄터리인데 거기서 응달이라 기름진 전답이 있어보이지도 않고
무엇으로 시내 유학간 자녀들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셨는지 친구 부모님이 위대하게 느껴졌답니다.
그리운 내 친구~~~

<span class="guest">솔향채</span>님의 댓글

솔향채 작성일

마음이 아려오는 글이네요.
소중한 친구들이 한명, 두명 세상을 떠나고
지난주에 아끼던 후배도 암투병하다 떠나고~

고향의 전답은 묵전이 되어 산천으로 변하고
우리시대가 지나면 고향에 남을 사람은 점점 줄어 줄고
고향 지킴이 한 사람으로서 인구가 감소하는게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되어가고 있어서
그러나 기대해 봅니다. 연륙교가 건설되면 귀농이 늘지 않을까 하는~
소중한 친구를 생각할때 마다 그리움이 많이 밀려오겠네요
허리띠를 졸라메며 공부시켰을 우리네 부모님들 위대하시지요.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span class="guest">감나무</span>님의 댓글

감나무 작성일

가슴이 아리네요.
누굴까 누굴까 좁은 머리를 굴려보지만
도통 감이 잡히지 않지만
혹시 부산에 박????????은 아니지요?
먼저 떠난 우리의 친구가 몹시도 안타까움을 남기네요.
이렇게 떠날 삶
우리는 뭘 그리며 그렇게도 아웅다웅 살고 있는지....
추운 날씨에 모두 몸조심 하세요.

오아시스님의 댓글

오아시스 작성일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옹삭하기로는 말이 필요없는 삶의 터전에서도
우리 부모님은 한둘아니고 육남매이상을 키워내신것보면
때로는 부모님의 살아오신 삶을 생각하면
이까짓것 하고 용기를 낼때도 있었답니다
동백꽃은 그 자리에 지금도 피고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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