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자유게시판

본 홈페이지는 1996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금오도ㆍ금오열도 홈페이지입니다. 본 홈페이지에 있는 모든 게시판에 로그인 없이 누구든지 자유롭게 글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사진은 100장, 동영상은 100MW 까지 가능합니다.


금오열도 근대사에서 어업생활상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남면지 조회 299회 작성일 24-02-12 00:08

본문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근대 사회의 기준을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로 보며현대는 1945년 해방을 기점으로 삼는다따라서 근대 사회는 일본의 침략과 관계 깊으며남면 지역의 취락에 영향을 미친 것도 예외는 아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어족 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에 조선 전기부터 일본 대마도 어민들의 고기잡이가 있었다세종 때에 이르러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우리나라 남해 각 지역에서 고기잡이 지역을 넓혀줄 것을 여러 차례 부탁해 왔다그 결과, 1441(세종 23), 지금의 삼산면 지역인 고도(孤島초도(草島지역에서 고기잡이에 관한 협정이 맺어졌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고득종(高得宗)이 아뢰기를,

대마도 도주 종정성(宗貞盛)이 신에게 이르기를,‘대마도는 산에 돌이 많고 척박하여 경작할 만한 땅이 없습니다대마도의 백성들은 오로지 고기 낚는 것으로 생업을 삼기 때문에매년 혹은 450혹은 780척씩 고초도(孤草島)에 가서 고기를 낚아 먹고살고(自給있습니다… 대마도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여기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죽기를 무릅쓰고 그곳에 가서 낚시질하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대마도의 어민들이 삼산면 지역(·草島)으로 가는 길은 남면 지역이 길목으로 이곳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음을세종실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허후(許詡)가 의논해 아뢰기를,

"비록 고기 낚는 배라도 만일 당치않은 곳(非處)에 이르면 왜적으로 논한다는 것은 이미 일찍부터 약속을 정한 것인데안도(安島)와 금모도(今毛島금오도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임)는 고기 낚는 배가 왕래하는 곳이 아닙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안도와 금모도가 고초도로 왕래하는 곧은 길인가 아닌가를 영리한 사람을 임시 관리(差使員)로 임명하여 가서 살피고 보고하라."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형성된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크리스트교 포교와 관련하여(切支丹關係쇄국 정책을 강화하면서 일본인들이 한반도 주변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나일본 어민들이 몰래 고기잡이하는 일(密漁行爲)은 사라지지 않았다.

1876(고종 13)의 강화도조약에 따른 조선의 개항은 일본인들에게 한반도 주변 바다에서의 어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따라서 외줄낚시(一本釣주낙(延繩그물을 이용한 어업(漁網漁業)뿐만 아니라 잠수기 어업(潛水器漁業)까지도 조선의 바다에서 이뤄지게 되었다.

일본 어민들에게 조선의 바다에서 어업 활동을 합법화시켜준 것은 1883년 7월 25일 체결된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이었다이 통상장정의 제41관에 의해 일본에 전라·경상·강원·함경 등 4도 해안에서의 어업 활동이 허락되었다.

세키자와 아케키요(關澤明淸)와 다케나카 구니카(竹中邦香일행이 1892년 1도쿄를 출발하여 조선 연안을 돌아보고 1893년 돌아온 뒤일본의 조선 어장 개척을 위해 우리나라의 수산·어업 상황 등을 정리한조선통어사정(朝鮮通漁事情)에는 일본 어민들이 우리 어장으로 오는 길을 알려주고 있다.

 

어업에 편리한 곳은 경상·전라도의 남부로서 모두 부산의 서남쪽에 있으므로후쿠오카(福岡사가(佐賀나가사키(長崎구마모토(熊本가고시마(塵兒島)의 현()에서 출어하는 사람이 부산에 이르는 길은 많이 돌아와야 한다야마구치현(山口縣)의 동부즉 세또내 지역과 히로시마(廣島오이타(大分에히메(愛媛가가와(香川오카야마(岡山등의 지역에서부터 출어하는 사람은 어업의 종류에 따라 제주도·소안도·거문도·기타 전라도의 남면의 어장으로 직접 가는 것이 편리하다.

  

조선통어사정에는 조선해에서 어업을 장려해야 하는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첫째일본의 북해도 어장보다 도미·숭어·꽁치 등의 어류가 풍부하고둘째북해도는 봄에 청어겨울에는 연어 등 어업 기간이 길고 겨울에 추위가 너무 심한데조선해는 일 년 내내 어업이 가능하다셋째조선은 상어·전복·해삼 등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가치가 높은 것이 풍부하며청나라의 개항장 가운데 톈진·뉴좡(牛莊즈푸(芝罘상하이 등과 가까워 편리하다넷째군사적인 관점에서도 러시아가 조선 어장을 노리고 있으니먼저 차지하는 것이 좋으며유사시 어민들을 해병으로 활용하여 경비나 길 안내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에는 1895년 1월 8일자 대판조일신문(大阪朝日新聞기사가 실려 있는데이 자료를 통해 볼 때,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운동 이전에 일본 어민들이 남면 지역의 금오도·나발도 등에 와서 고기잡이를 하면서 살고 있었다.

 

또한조선통어사정에서 한국에서 고기잡이 하는 일본 어부들을 유사시에는 군인으로 삼아 정규군을 지원하도록 하고자 했는데실제 동학농민운동 때 여수의 좌수영 공방전에는 금오도와 나발도 등에서 어업 활동을 하던 어민들이 군인으로 참여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당시 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던 일본 군함 쓰쿠바(筑波호의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그 곳 삼도통제사로부터 동학 농민군이 좌수영을 포위하고 그 정세가 매우 급하니 우리 군대가 와서 후원해 달라는 조회가 왔습니다그 청을 받아들여 좌수영 부근으로 가서 우리 육전대를 상륙시키고 지난 22좌수영 북쪽 30리에 있는 순천부 관내 덕양리에서 동학 농민군을 격퇴시켰습니다농민군은 시체 2대포 2기타 기()와 서류 등을 버리고 도주했고일본군은 죽고 다친 사람이 없으며적의 포로가 1명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어민이 17명쯤 그 곳에 살고 있으므로우리 군함은 잠시 그 곳에서 머물렀다 되돌아가겠다고 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한국근대사료집성(韓國近代史資料集成)에는 조선어업협회(朝鮮漁業協會)가 우리나라 각 어장을 돌아보고 펴낸 1897년 12월 15일의 보고서(巡邏報告書)가 탑재되어 있는데, 1897년 남면 안도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들의 어업 활동에 대한 기록이 있다.

 

 

조사 지역

종류

선적

어선 수

승선 인원

어장

1개월 동안 1척이 올린 어획고

면허 여부

안도

(雁島)

도미낚시(鯛繩)

가가와현

(香川縣)

12

42

안도 서북쪽

98

있음

부속선

6

12

·

있음

방그물

(배후릿그물手繰)

야마구치현(山口縣)

3

10

?

있음

 

 

21

64

 

 

 

 

 

 

  

일본 시코쿠의 가가와현과 혼슈 끝에 있는 야마구치현의 어부들이 안도의 서북쪽에서 도미낚시(鯛繩)와 외줄낚시(手繰)로 고기잡이를 하는데출어한 어선과 잡은 고기를 일본으로 운반하기 위한 부속선을 포함하여 21척이며, 64명이 참여하고 있다.

또한 안도(雁島)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안도는 23개의 열도로 이루어져 있으며일본인은 안도와 부도(カマシマ) 2곳에 머무른다안도는 여름철 서남풍을 피하기 좋고부도는 가을과 겨울 동남풍을 피하기에 좋다안도 사람들은 인정이 많으며일본어업협회 우편함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899년 2월 28일자 보고서에 따르면안도 주변에서 장어(章魚)를 미끼(餌料)로 도미를 잡는데생선을 소금에 절이는 배(鹽切船)에 팔며하루에 잡는 양은 80150마리로, 375g 1마리당 가격은 1전 8(一錢八里)였다.

  

조사 지역

종류

선적

어선 수

승선 인원

회원 여부

면허 여부

비고

안도

(雁島)

도미낚시(鯛繩)

히로시마

9

36

회원

있음

 

 

에히메

28

112

있음

 

 

가가와

5

20

있음

 

 

부속선

히로시마

2

7

비회원

없음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운송

히로시마

1

3

회원

있음

 

 

 

 

46

178

 

 

 

 

 

 

 

 1897년과 1899년 2년 사이에 안도 주변으로 도미를 잡으러 온 배는 219%, 어민은 278%가 증가하였으며출어 지역도 히로시마와 에히메현 등으로 넓어지고 있어일본인들이 남면 지역의 어장에 급속히 파고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에서 남면 지역으로 고기를 잡으러 온 배들 거의가 면허를 가지고 있어일본에서 합법적으로 허가를 받았으며조선어업협회 회원으로 가입된 배가 많아 우리나라에서의 일본인 어업을 이 협회가 관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어민의 우리나라 근해 어업 진출은 어족 자원의 남획어장을 둘러싼 우리 어민과의 충돌의병 에 의한 일본 어민 공격잡은 해산물의 처리 등 다양한 문제를 일으켰으므로일본 정부에서도 이에 대한 대응책이 요구되었다.

1900년 8월 29부산 주재 일본 영사 노세 다츠고로(能勢辰五郞)가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靑木周藏 殿)에게 보낸·한 무역진흥 확장 등에 관한 건()이란 보고서에서조선 연해 어업 보호 및 단속(取締)에 관한 의견(卑見)’을 통해서 일본 정부의 대응 방안을 살펴볼 수 있다.

  

한국 남쪽 4도에서의 우리나라 어업은 10여 년 전만 해도 불과 수십 척의 작은 배가 보통의 어구를 가지고 어업에 종사하며어획물 같은 것도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공급하는 데 불과했으나최근에 와서는 어선의 증가가 두드러져 작년과 올해 같은 때는 한 해의 출어선이 15,00척으로 증가했다뿐만 아니라 작은 운반선(小廻船)이라고 부르던 것이 대형으로 바뀌었고어업 도구도 해마다 개량되어 잠수기선단노(蛋帑)나 정어리 그물(鰯網いわしあみ같은 것으로 점차 촘촘해졌다.

그 결과 드디어 어족을 남획하고 번식을 방해하여 어족의 수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고래와 해삼과 같은 것이 최근 포획고가 현저히 줄었기 때문에 어선마다 경쟁하는 문제점이 생겼다따라서 일본 어민이지만소재지 지방관과 한통속이 되어 일본인을 빼고 어장을 독점하려는 비열한 사람(卑劣漢)마저 생겼다.

한편한국인들도 최근 어획의 감소와 함께 정어리 그물·대구를 잡기 위해 바다 속에 치는 그물(鱈網たらあみ같은 것을 가지고 자기들 어장에 와서 그들의 이익을 빼앗는 일본인이 있다고 하여해마다 어업 시기가 되면 분쟁이 그치지 않는 상태이다.

이러한 문제가 잇따라 나오는 데도 일본에서 오는 어선은 매년 증가하기만 하니만일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지금부터 10년이 못 되어 한국 영해의 어업도 절망적으로 될지도 모른다이에 부산 주재 일본 영사관(本館)에서는 부산항의 조선해통어조합연합회(朝鮮海通漁組合聯合會본부 출장소 직원 및 그 업자들에게 한국 연해를 일본의 영해처럼 여기고한국인과 두텁게 사귀며어족 자원을 보호하도록 계속 타일렀지만도저히 그 효과를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근래에 와서는 일본에서 한국 연해 어장으로 곧바로 와서 감찰 없이 어업에 종사하는 경우도 많다.

저들에 대해서는 도저히 단속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니그에 대한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된다또 과거의 일본 어선은 어획물을 그 지방에서 판매하는 데 지나지 않았으나근년에는 이를 말리거나 훈제하여 일본으로 수송하는 것이 많은데그들은 육상에서 일삼아할 수 있는 편의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충분한 이익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또 육지에서 일할 수 있는 공간(生洲)을 어장 부근에 설치할 수 있다면 선어(鮮魚)를 곧바로 일본으로 수송할 수 있어 큰 이익을 볼 수 있다이에 관해서는 제반 설비로 보아 거제(巨濟), 욕지(欲知), 소안(所安및 안도(安島네 섬에서 약간의 토지를 빌려 어류의 훈제 건조 저장 등에 사용하는 한편어민의 편리를 제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위의 4섬에 순사 2명씩을 파견하여 주둔시키고사무를 담당하는 사람(書記生), 하급 경찰(警部), 수산 기술원(水産技手각 1명을 어업지의 중앙인 소안도에 머무르게 하여 통어조합연합회에서 마련한 작은 증기선(小蒸氣船)으로 각 어장을 순회하고서기생과 경부를 시켜 그곳 어민 간의 교섭 문제를 다루게 하며또 수산 기수로 하여금 어장의 탐험과 어족의 보호 및 번식 등을 맡게 한다면 일거양득일 것이다그렇게 한다면 조선 연해는 오래도록 일본 어민의 보고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국 연근해가 황금 어장임이 소문으로 퍼지자고기잡이를 위해 오는 일본 어선들도 해마다 증가하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보호와 장려 속에 일본 어민의 본격적인 출어와 이주가 시작되었다.

1904년 러·일 전쟁의 시작과 더불어 한일어업조약을 고쳐 전라도경상도에만 근거지를 허락한 것을 전 조선으로 확대하였으며, 1908년 한일어업협정 체결로 일본인도 어업권을 인정받게 됨으로써 근거지 정착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이주 어업이 발달하게 되었다일본과 우리나라를 오가며 고기를 잡던 통어(通漁어업 시대에서 이주 정착 어업 시대로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통어 어업의 문제점은 어획물 처리로한국 근해에서 일본까지 운반하는 것은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어획물이 변질되기 쉬웠다한국에서 처리하고자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다지 생선을 많이 찾지 않았으며또한 말이 통하지 않아 어려움이 따랐다따라서 한국 내에 어획물을 처리할 수 있는 근거지즉 이주 어촌이 필요하였다.

이주 어촌은 보조 이주 어촌과 자력(自力이주 어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전자는 지방 자치 단체나 수산 단체가 계획하고 보조하여 만드는 것이지만서류나 도면상으로 끝난 경우가 많아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그러나 어업 기지로서의 입지 조건이 좋고 자금 보조와 감독자가 좋은 곳은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모범적인 어촌으로 경상남도 통영군의 미륵도에 만들어진 오카야마현(岡山縣)의 이주 어촌이다이외에도 경남 사천군 삼천포면 동경리 팔장포에 만들어진 에이메현(愛媛縣)의 에이메촌경남 통영군 이운면에 만들어진 에이메현의 이리사무라촌(入佐村등이 성공한 보조 이주 어촌으로 알려져 있다.

자력 이주 어촌은 자기 자금으로 이주하여 어업에 종사함으로써 튼튼한 기반을 갖춘 어촌으로이들은 보조 이주 어민보다 어려운 가운데 끝까지 노력하여 이주 어촌을 형성해 나갔다.

1914년 1월까지내지인(일본인어업자 이주 어촌 조사에 보면전국에 59개 어촌에 이르며총 986, 3,900명에 이르고 있다이 가운데 단체 이주로 형성된 어촌이 10개이며, 5개 마을은 단체 이주가 포함된 것이다. 59개 어촌 중 가장 큰 마을이 경남 통영군 이리사무라촌으로 152호 641명이었다.

일본 어민들은 이전부터 우리나라 연근해에서 이른바돈벌이 어선(出稼漁船)’들에 의한 고기잡이를 해왔다어업은 잠수기 어업·주낙·외줄낚시·대구리형의 저인망(瀨網등이었지만당시의 어선들이 대부분 5명 정도가 타는 소형 어선이고기계에 의존하기 보다는 바람에 의존해서 고기잡이를 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비친 당시의 한국 어업이한마디로 말하면 졸렬하다.”할 만큼 보잘 것 없었으며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소규모 어선이라 해도 한국 연근해에 출어해 오는 일본의 어선은 상당한 수입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이 남면 지역에 들어와 잡은 고기를 가공하는 시설을 설치한 것은 1909년부터로 보인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탑재된 1932년 발행조선공장명부(朝鮮工場名簿)에 따르면일본인 강교학송(岡橋鶴松)이 1909년 4연도리에 식료품 공업 허가를 받아 그의 이름을 딴 말린 정어리 제조장(煮乾鰮製造場)을 세운 것으로 나타나 있다이어 1910년에는 길부설태랑(吉富雪太郞)이 안도에, 1914년 나카타 아라마쓰(中洲芳松)가 남면 심장리에 말린 정어리 제조장을 설치함으로써 이 지역에 가옥 재료와 취락의 모습에 변화를 가져왔을 것으로 보인다.

1918년 3월 14일과 3월 29일의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에는전라남도 여수군 남면 연도리와 안도리에 연도어업조합안도어업조합 설립을 허가한다.”라는 기록이 있어 일본인들의 남면 정착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는데안도 어업조합은 마을 회관 옆자리에 세워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25년 안도 어업조합은 조합원이 165예산은 14,331연도는 215명에 11,388이었다.

  

또한 1919년 4월 7일자 관보에는 안도의 길부설태랑에게 4월부터 11월까지 남면 우학리와 유송리 경계 지선에서 갈치(大刀魚조기(石首魚등을 잡을 수 있는 면허를송고·함구미·두모·안도 등의 해조류 채취(採藻업자나 어업조합에 우뭇가사리(石花菜), 미역(和布), (海苔등의 해조류 채취 면허를 주었다.

동아일보1928년 7월 19자 기사를 보면 안도에서는 어업권 분쟁에 따른 주민 간의 갈등도 심했음을 알 수 있고같은 신문 7월 17일자 기사를 통해 외래 자본의 침투에 따른 연도 주민의 어려움도 파악할 수 있다.


소리섬과 승강이목(신갱수도)을 사이에 둔 안섬은 금오열도 가운데 해산물이 풍부하기로 첫손가락을 꼽는 곳이니면적은 넓지 않으나조류와 포구의 출입이 어업에 가장 적당한 곳이다.

주민은 조선인과 일본인을 합해 이백 여 가구에 인구는 천여 명이다이 좁은 곳에 천여 명이 살아가는 것은 해초가 나고고등어·민어·문어·멸치 등이 많이 잡히기 때문이다.

그 근해에서 나는 어업 생산액이 이십 여 만원인데그 중 일본인이 안도 어장에 들어와 고기를 잡아(入漁생산액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고 이 섬에 떨어지는 것만 해도 십 만원에 가까워 그들의 생활은 다른 섬에 비해 제일 풍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그들의 생활을 위협할 큰 문제가 일어났으니이것은 어업의 권리문제이다이 섬에서 가장 많은 생산액을 차지한 것은 멸치 어장인데멸치가 가장 많이 잡히는 이야포에서 안섬사람이 멸치를 잡지 못하게 된 것이다.

섬사람의 공동어장이었던 이야포가 일본인의 소유가 되어 그 동안 여러 가지 분쟁이 있었으나좁은 보호 구역섬사람의 생존권 보호 등을 위해 어업권을 가진 사람에게 직접 방해가 되지 않으면 전통 어업 방법으로 어업을 할 수 있다는 조건부로 인가되었기 때문에 안도 사람들은 이야포 안에서 멸치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조선 사람 여섯 명이 공동으로 경영하는 어장이 된 뒤로 그 포구 안에 안도 사람의 멸치배가 들어가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여 섬사람들로서는 어업을 할 곳을 잃었다.

때문에 새로 문제가 일어나최근에는 순사가 밤마다 어장에 나와도 싸움이 그칠 때가 없다섬사람들은 사활이 걸린 문제 해결을 위해 그동안 여수군청에 이백 여명이 진정하러 몰려가 밤을 세운 일도 있고도청에 진정 위원을 보내기도 했다.


여수항에서 대경도·소경도 사이를 지나 왼쪽으로 돌산 섬과 송도·화태·나발·월호·제도를 지나 금오도를 오른쪽에 바라보고또 왼쪽으로 드넓은 태평양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안도·부도를 거쳐 소리섬(鳶島,‘소리는 솔개의 방언)에 들어가는 어귀 승강이목에 이른다. 

승강이목이란 의미는 동쪽과 서쪽 한바다의 파도가 서로 부딪쳐 물결과 물결이 승강이를 하는 곳이라 하여 지은 것이며또 하나의 이름은쑤염이(쏨팽이)으로이것은 어류 가운데 가장 사나운 쑤염이와 같이 물결이 사납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섬은 여수 열도의 제일 끝남해 가운데 20여 해리 떨어져 있는데주민이 230여 호인구 1,400여 명이나 되며 400여 마지기 1,500여 마지기나 있는 작지 않은 섬이기 때문에 주민은 반농반어로 총생산액이 89만 원에 달해 숫자 통계상으로 보면 전체 섬사람의 생활은 풍족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생활은 너무 가난하여 학교 하나를 유지하지 못할 정도이다그 원인은 외래 자본의 힘에 생산물의 대부분을 바치게 되는 까닭이다소리도 토지의 70% 이상을 이 섬 밖의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어 농산물을 결국 그들에게 주고또한 해산물도 풍족하지만먹고살기 위해 미리 빌려 쓴 빚과 이자 갚는데 사용한다그들은 결국 1년 동안의 빚과 이자를 치르기 위해 농사짓고 고기를 잡는 셈이다.

영리한 자본가들은 중매인(仲商) 시켜 약간의 돈을 섬에 펴 놓고 농업과 수산업의 수확 시기가 오면 시장 가격(市價)과 상관없이 그때 가격으로 거둬 감으로써 돈을 빌린 사람들은 이자와 물건 두 가지를 함께 제공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많은 학생을 수용해야 하는 커다란 건물운동장교직원 관사 등이 함께 세워진 학교의 설립도 취락의 모습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총독부 고시 제51호로, 1919(大正 8) 3월 20일 왼쪽에 기록된 공립소학교의 설치를 허가하는데학교 이름은 안도공립심상소학교이며전라남도 여수군 남면 안도리에 위치한다.”라는 1919년 3월 24일자관보를 통해 남면 지역에서는 안도에 가장 먼저 일본인 자녀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댓글목록

금오지기님의 댓글

금오지기 작성일

위 내용은
김병호 선생님께서 편찬에 참여하신 남면지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김병호 선생님께서는 금오홈 초창기 때부터 참여해 주시고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셨습니다.
이번에도 남면지를 보내주셔서 이곳에 주요 부분을 올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

안도 본동이나 서고지에 일본식 집이 있었던 것도
이야포 그 너른 몽돌 밭, 멸치가 말라가던 풍경도
일본에 수출한다던 돌김이나 성게알도
가볍게 흘려보낼 이야기가 아니었네요.

이야포가 일본 사람으로 넘어가고
안섬사람들 마저도
이야포에서 멸치를 못 잡게 된 건
너무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여전히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데
우리 고향 풍부한 바다를 기억하는 저들의 욕심은
어떤 말도 못 하고 얼마나 아까울까 생각이 들면서
다시는 저런 가슴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나라가 좀 똑똑해졌으면 좋겠습니다.

<span class="guest">솔향채</span>님의 댓글

솔향채 작성일

금오도에 이런 어마머마한 역사가 있을 줄이야
안도가 일본의 돈 줄이었네요.
어릴적 부모님께서 물이 많이 빠질때면
톳, 성게알을 까서 팔던적이 있었는데
일본으로 수출한다고
새로 알게된 어업생활상 잘 읽고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span class="guest">미리</span>님의 댓글

미리 작성일

커다란 둑이 무너지는 것도 작은 구멍에서 시작한다고
1800년도 부터 야금 야금 생쥐처럼 남쪽 바다부터 왜가 갉아먹고 있었군요.
처음부터 내 주지 말았어야 하는데
민란 조차도 왜군을 불렀으니
우리 나라 리더의 무능이 식민통치는 정한 이치 지금도 정치가 저 모양 저 꼴 들이니
어쩐데요.
이 나라에 두번 다시 전쟁은 안 났으면 좋겠는데요.

COPYRIGHT Ⓒ 금오열도.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by 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