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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영생으로(탈북여성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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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성복 조회 527회 작성일 03-08-2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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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영생으로(탈북여성 수기 - 1)


※ 98.7 탈북하여 중국에 은신중인 탈북여성이 북한의 참상과 탈북후 기독교인이 된 계기를 집필한 수기를 연재합니다. (집필자의 신변보호를 위해 인명 및 지명 등은 삭제하였음)



제 1 장 - 1 편- 살길을 찾아서

남편과 내가 처음 두만강을 건넌 때는 1998년 봄 어느날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 아침이었다. 보리장마라고 하는 이 비는 꼬박 3일을 멎지 않고 내렸는데 당시 임신 6개월의 몸이었던 나에게 찬비를 맞으며 걷기란 너무도 힘겨운 일이었다.

더욱이 국경 여행증을 떼지 못하여 평양에서 두만강 접경까지의 거리를 객차빵통 위에서 비와 함께 타고 왔으니 뱃속의 생명도 고단했는지 자꾸 아랫배를 당겨서 두손으로 배를 쥐고 걸었다.

그러나 중국에 있는 고모를 찾아서 굶고 있는 내집 식구들의 식량을 마련해 볼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나는 고통을 이겨냈으며 비내리는 틈을 이용하여 국경초소를 넘어야 한다는 남편의 뒤를 따라 두만강에 도착했다.

두만강의 넓이는 불과 10m도 넘지 않을 듯 했으나 연 3일 동안 내린 비 때문에 강수량은 불어나 검푸른 물살은 바라보기만 해도 무서웠다.

떨리는 마음으로 남편의 손을 잡고 강물에 들어섰으나 몸이 물살을 따라 떠내려 가는 것 같아 비실거리던 나는 그만 남편의 손을 놓고 물속에 어푸러졌다.

그때 만약 남편이 없었더라면 또 재빨리 일으켜 세우지 않았다면 나는 뱃속의 두생명과 함께 두만강에 가라앉아 물고기 밥이 되었을 것이다.

살길을 찾아서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온 사람들 속에는 강을 건너다가 혈육들을 잃고 혼자서 중국 땅을 헤매던 이들을 나는 적지 않게 보아왔고 또 내자신이 현실로서 체험했었기에 이 두만강을 눈물의 강이라고 생각한다.

허리를 넘는 두만강을 살아야 한다는 초인간적인 힘으로 헤쳐넘은 우리는 드디어 중국 땅 가파른 산등성이에 올라섰다.

높은 산마루에 올라서서 우리가 걸어온 산과 들을 바라보노라니 벌거벗은 내나라 북방의 산림과 황량한 조국의 들판이 너무도 처량하게 안겨와 비애의 눈물을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을 밟았는가? 얼마나 고달픈 인생들이 이 두만강을 건넜을까. 아! 조국아 너는 왜 그다지도 가난하고 왜 그리도 서러운 것이냐…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렀고 내리는 비소리마저도 굶주림에 우는 내나라의 울음소리 같아 가는 발길이 너무도 무거웠다.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산밑까지 내려오니 흰연기가 피여 오르는 집이 바라보였다. 하루종일 찬비를 맞으며 산속에서 헤맨 우리에게 눈앞의 산막 집은 그리도 반가웠지만 북한에서 들은, 여자만 보면 강간하고 그 피를 뽑아서 한국에 팔아먹는다는 소문 때문에 쉽게 발길을 향할 수가 없었다.

따뜻한 집을 눈앞에 두고 찬비를 맞으며 서있자니 추위는 점점 더하여지고 나는 임신 후기로 자주 마려운 오줌 때문에 울음이 날 지경이었다.

한번 바지를 벗을 때마다 가뜩이나 추위에 몰려둔 내몸에 찬비가 휘뿌려졌고 젖은 옷을 다시 올려 입을 때면 언손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서 나중엔 바지를 입은 채로 그냥 오줌을 누었다.

나의 형편을 곁에서 지켜본 남편이 "안되겠다. 사람부터 살려야겠다"며 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무서움과 경계심을 품고 산막 집에 들어간 우리는 주인 아바이의 친절하고 선한 마음씨에 감동되었으며 북한에서 들은 중국인들에 대한 야만적인 소문이 거짓소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주인 아바이는 우리부부가 두만강을 건너온 눈물겨운 사연을 듣더니 우리가 찾는 고모를 자기가 찾아주겠노라고 선선히 응낙하면서 배가 고파 매일같이 두만강을 건너오는 북한사람들이 불쌍하여 못보겠노라며 너희나라 김정일이는 사람의 자식도 아니라고 욕을 퍼부으며 격분해 하였다.

처음 우리는 주인 아바이의 욕설에 민망하여 그만 하라고, 가난구제는 나라임금도 못한다고 설득했었는데 주인 아바이가 켜놓은 한국 라디오를 듣고서야 속아 살아온 북한사회의 어제와 오늘을 금시로 즉각 알 수 있었다.

또 현실을 증명하는 96년에 평양에서 월남한 여성의 증언이 나왔는데 짓밟히고 억눌려 살아온 자신의 인생담, 현재 추악한 북한의 실상을 그는 낱낱이 고발하기도 했다.

조선은 주체농법대로 농사를 짓고 해마다 풍작을 이룩한다고 선전해 놓고는 인민들에게 무려 5년 동안이나 식량공급을 못하는 나라, 무상치료, 무료교육을 실시한다고 하고도 병원에 가면 소독약 하나없고 교원들이 밥을 먹지 못하여 학교출근을 하지 않아서 인민학교는 물론 중학교도 빈 건물뿐이다.

인민들에게 "고난의 행군"을 선포하여 3년간을 전후복구 건설시기처럼 난관을 극복하라고 하여 당과 수령께 충직한 이 나라 백성들은 내가 사는 사회주의를 지키자고 얼마나 간고분투한 생활을 하였던가.

벼 뿌리와 칡뿌리로 대용식량을 해결하였으며 하루한끼 먹는 식법을 내어놓고 허리띠를 졸라맸으나 약속한 "고난의 행군" 이 끝나자 또다시 "고난의 강행군" 을 선포한 것이 지금의 김정일이었다. 그 강행군 속에 힘없는 노동자, 농민은 얼마나 굶어죽고 병들어 죽었던가.

끼니를 굶고 직장출근을 하였다가 어지럼증으로 다시 일어서지 못한 노동자는 얼마였고 죽어도 밭고랑을 베고 죽으라는 협동조합의 강요에 못 이겨 물에 간장을 풀어먹고 농장 벌에 나섰다가 밭고랑에 쓰러진 농민은 또 얼마이더냐.

한줌만한 어린 것의 배를 채워주지 못해서 굶어죽은 자식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다가 이 세상을 저주하며 자살로서 항거한 이가 얼마였고 칡뿌리를 구워먹고 대변을 보지 못해 눈도 감지 못하고 원통하게 숨진 이는 얼마인가.

나는 온몸이 떨리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애를 낳고도 칡뿌리를 씹어야 했고 미역국 대신에 시래기 소금국을 먹으며 지켜온 사회에 대한 배신감에서였다.


아, 속았구나. 30년을 그냥 속아 살았어. 그제서야 " 비밀뒤에 사실이 있다" 고 한 하버갈의 옛 구절이 생각났고 너무도 뒤늦게 알게 된 사회의 깨달음으로 하여 나와 남편은 당국자들에 대한 치솟는 적개심과 용서할 수 없는 추호의 맹세로 긴긴밤을 하얗게 새웠다.


이튿날 주인 아바이의 도움으로 우리는 드디어 중국에 사는 고모를 찾게 되었다. 나는 30년만에 만난 고모에게 지금 북한의 식량난과 그 결과로 금년에 환갑인 아버지가 영양실조에 걸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형편임을 이야기하면서 불쌍한 내집 식구 7명을 살릴 수 있는 도움을 간청했다.

고모는 35년전 문화혁명때 헤어진 북한에 있는 남동생이 불쌍하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오죽했으면 네가 그 몸을 가지고 날 찾아왔겠느냐고 목메인 소리를 하면서도 자신의 생활이 너무 어려워 도울 길이 없노라며 가지고 온 돈 1원 50전을 내 손에 쥐여주고 돌아가 버렸다.

고모를 하늘처럼 믿고 머나먼 천리길을 찾아왔는데 한달 생활비도 안되는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떠나올 때 여비로 500원을 꾸고 그간 집에서 먹으라고 강냉이 20kg을 꾸어주고 왔는데 돌아가 꾼 빚을 물고 나면 일전도 남을 것이 없었다.

이런때를 두고 벼르던 잔치 날 맹물 한 사발뿐이라고 했던가 싶어 죽을 고생하며 찾아온 나 자신이 어리석고 오늘도 굶고 앉아 돌아올 딸자식을 기다릴 부모님 생각과 금방 돌을 넘긴 딸이 잠도 안자고 일어나 앉아서 먹을 것을 달라고 울어 보챌 애처로운 모습이 눈앞에 안겨와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아, 세상은 정말 야박하구나. 그 불쌍한 내집 식구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차라리 이 땅에서 죽을지언정 빈손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우리들이었기에 남의 집 삯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 결심을 했으며 보름동안만 일을 잘 해주면 품삯을 후히 주겠다는 주인 아바이의 승낙을 받았다.

그러나 마지막 믿었던 이 일마저도 우리 부부에게는 가슴저린 고통으로 되돌아왔다. 일을 시작한지 한주일째 되는 날 아침 중국당국 사람들에게 잡혀 인근 수용소로 끌려간 것이다.


남편과 나를 따로 가두었는데 내가 간 여자감옥에는 중국에 시집왔다가 붙잡힌 여자가 10여명이나 갇혀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들으니 지금 중국에 살길을 찾아서 탈북한 조선사람들이 그리도 많이 들어와 있는데 그것 때문에 북한에서 탈북자들을 잡아달라고 정부에 간청하여 중국 당국에서 대수색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북조선에 나가서 매맞아 죽느니 차라리 이 중국 땅에서 굶어 죽겠노라며 감옥에서 주는 음식을 모두 변기통에 쏟아 버렸다. 감옥에서 주는 밥이라야 소금물에 강냉이 삶은 것을 하루 두번주는데 중국에서는 개・돼지에게도 먹이지 않는 쭉정이 강냉이 삶은 것을 굶어사는 거지의 나라 북조선 사람들이라고 짐승보다 못한 음식을 대접하고 있었다.

또한 도망을 금지한다며 하루 한번도 밖에 내보내지 않았고 대소변도 감옥안에서 바께쓰에 보게 했다. 그리고 수시로 그들의 움직임을 보려고 설치해둔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보면서 여자들이 용변을 볼 때마다 텔레비전앞에 바싹 다가서서 키득거리며 그들의 엉덩이를 주시해보곤 했다.

하루 단 한번도 햇빛구경을 못하고 죽음의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은 모두 거미처럼 말라 있었으며 얼굴은 영양이 부족한 임신부의 얼굴처럼 검은 기미가 다닥다닥 돋아 있었다.

나는 아무런 죄도 없으므로 다음날로 감옥안을 나서는 것을 본 감방안의 여자들은 " 잘 가세요. 우린 모두 여기서 죽을 거예요"하며 하나같이 서러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남편과 내가 차에 올라탈 때까지도 손바닥만한 공기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떠나는 우리를 바래 주었다.

같은 여성으로서, 같은 북조선 동포로서 그들이 이국 땅에서 당하는 고통과 민족적 멸시를 목격하노라니 인민을 이 지경으로 내 버려둔 북한당국에 대한 증오심이 솟구쳐 올랐다.

20대 꽃다운 나이에 한창 젊음을 자랑하며 시대의 꽃으로 피여야 할 그녀들이 과연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거친 이국 땅 차가운 감방안에서 저리도 서러운 눈물을 흘려야 한단 말인가.

그대들에게 배고픔의 고통이 없었더라면 인간의 자유가 보장됐더라면 어찌 그들이 산 설고 물 설은 남의 나라 타국 땅에 정붙일 생각을 감히 했겠는가.


북한 인민들의 탈북은 결코 그 인간의 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잘못 만난 서러움이며 영도자를 잘못 선택한 민족의 실족함이다.


북한에서 날마다 증가되는 탈북자 수를 막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지만 인간에게 가장 급선무이며 초보적인 먹는 문제, 배고픔의 고통을 시급히 해결하지 않고서는 탈북을 막을 수가 없다.

남편과 나는 그날저녁 북한의 보위부에 호송되었다. 보위부 부장이라는 자는 우리부부를 마치 큰 반혁명분자라도 잡은 것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며 " 아무리 어려워도 사회주의를 지켜야지 배가 좀 고프다고 임신부까지 막 건너가면 나라위신이 어떻게 되겠는가"고 큰 소리를 쳤다.

그렇다면 임신부는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그 무슨 방법이 있는가. 임신부가 애를 낳고 정신이 잘못되어 자기 핏덩이 어린 것을 삶아먹은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먹고 살아야 사회주의도 지킬 것이 아닌가. 또 국가에서 배급을 준다면야 어느 누가 이런 타국 땅에까지와서 식량동냥을 다니겠는가.


굶어도 앉아서 조용히 굶고 소문을 내지 말라는 소린데 하늘의 해를 손 바닥으로 막아보려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황당한 수작이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임신부란 특수한 조건 때문에 감옥에서 풀려 나왔지만 남편을 혼자 두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연약한 이 몸이 그 험한 세상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억센 남편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가정을 꾸리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생활의 무게를 떠메고 묵묵히 자신을 바쳐온 남편.

처가집이 뜻밖의 전기화재를 당하여 한지에 나앉게 되었을 때도 집식구 모두를 자기집에 데려다 놓고 불평한마디 없던 그 남편이 오늘은 최후의 생활전선에 나섰다가 이렇게 감옥신세까지 진다고 생각하니 남편이 너무도 불쌍하고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또다시 중국에 들어갈 결심을 내렸으며 손에 돈을 쥘 때까지 노력을 다할 결심으로 또다시 중국으로의 탈북 길에 올랐다. 앞으로는 지옥같은 감옥에 남편을 홀로 두고 가는 마음이 나의 발목을 잡고 뒤에서는 굶고 있는 부모자식의 가여운 생각이가는 발길을 재촉했다.

10일전 남편과 함께 익혀둔 산길을 따라서 200리가 넘는 중국 땅에 들어선 나는 집을 떠나올 때 아버지가 적어준 주소와 산막집 아바이가 쉽게 찾았다는 기억을 찾아서 작은 고모의 집을 무사히 찾아 들어갔다.

1원 50전을 가지고 두만강을 건너간 줄 알았던 조카가 뜻밖에도 남산만한 배를 안고 자기 집을 찾아온 것을 본 고모는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지난번에 붙잡혀 북조선에 도로 나갔다가 남편은 감옥에 가고 나는 집식구들 때문에 또다시 이 중국에 들어온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남의 집 삯일을 해서라도 내집 식구를 살릴 수 있는 다만 얼마의 돈을 쥐고서야 나가겠다고 말했다.

고모는 "글세 네 사정은 알 만하다만은 네 그 배를 보고서야 삯일도 시키겠니… " 하고 자꾸 나의 배를 바라다 보았다. 그때 나는 만삭의 몸이어서 내가 보기에도 꼭 큰 독을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고 솔직히 말하면 10리를 걷기도 죽을 지경으로 힘이 들었었다.

하지만 살기 위하여 내집 식구를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하여 그 모진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낼 각오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모는 뜻밖에도 남편도 감옥에 간 바에는 차라리 돈 많은 중국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네 목숨 하나라도 살아남으라고 했다.

나는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빈혈을 느꼈다. 지금 내가 나혼자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이 중국 땅을 찾아왔는가. 이시각에도 늙은 부모님은 집 떠난 자식들이 돌아오기를 일일천추로 애타게 기다릴 것이고 두 어린 자식은 엄마가 먹을 것을 가져오는가. 눈이 까맣게 되어 내가 오기만을 바라고 있을 텐데.

부모,남편, 자식 다 버리고 혼자서 호강할 정신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나는 고모가 참으로 인간다운 말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말도 말이라고 하세요. 고모집엔 개도 이밥을 먹는데 우리집 애들은 보리죽도 없어서 못먹어요. 내가 그 불쌍한 자식을 버린다면 누가 내 자식을 돌봐주고 늙은 부모님은 또 누가 봉양하겠어요" 하고 따끔한 소리를 해주었다.

그날 밤 고모는 잠이 안오는지, 아니면 이 조카의 한 말이 뜨거운 가책을 느켰는지 밤새 잠을 안자고 뒤척이는 것 같더니 이튿날 아침 어디서 꾸어왔다며 인민폐 천원(미화 122불)을 내앞에 꺼내놓았다.

"네가 보다시피 내 생활이 어려워서 더 보태줄 수가 없구나. 이 돈을 가지고 가서 이 늙은 고모를 욕 많이 해라' 하며 돌아앉아 자꾸만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런 고모를 보니 나도 마음이 슬퍼져서 고모를 따라 소리없이 울었다.

이 세상에 돈이라는 것이 왜 생겨 가지고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괴롭히는 걸까 . 돈이 없어도 울고 또 그 돈이 생겨도 한없이 울게 되는 야속한 세상아.

고모는 며칠 더 있으면서 밥이라도 실컷 먹다 가라고 했으나 밥구경을 못하고 굶주려 있을 식구들 생각에 이밥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아서 다음날로 떠나기로 결심을 했다. 다음날 고모가 꾸려주는 몇벌의 옷가지를 꿍쳐가지고 급하게 두만강을 건너선 나의 마음은 집 식구들을 기쁘게 해줄 마음으로 기쁨에 젖었다.


이제는 아버지가 그토록 잡숫고 싶다는 강냉이밥을 한가마 해놓고 또 어머니가 좋아하는 새우젖을 사놓고 온 집식구가 한번 실컷 먹게 되었구나. 애들에게도 강냉이 꼬장빵을 해 먹여야겠다.


내 눈앞에는 두살배기 딸이 배가 부를 적마다 하얀 토끼이를 드러내며 웃던 모습이 안겨왔고 어쩌다 어머니가 강냉이밥을 사발넘치게 담아드리면 그 밥을 다 잡순 아버지가 " 오늘은 평양감사 부럽지 않다"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선히 어려왔다.

그러나 나는 너무도 기쁜 심정에만 몰두해 있다보니 다른 것을 중요시 하지 않은 연고로 그처럼 피와 땀의 노력으로 얻은 돈 천원을 도적에게 잃고 말았다.

고모가 준 돈을 북조선 돈으로 바꾸고 돈의 부피가 컸으므로 2만원은 보따리 속에 남은 3천원은 내 빤쓰주머니에 감추었는데 어떤 놈이 바로 내 봇짐을 훔쳐갔는지 알수가 없었다.

내 생명뿐 아니라 내 집식구 7명의 명줄이었던 돈을 잃은 나는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져 이성을 잃고 통곡했다. 그게 어떤 돈이라고 그게 어떻게 얻은 돈이 길래 내돈을 훔쳐갔느냐 . 내 집식구를 살릴 돈을 빼어가면 난 어떡한단 말이냐, 날강도 같은 세상아.

홀몸도 아닌 더욱이 만삭의 가냘픈 몸에 큰 배뿐인 나의 절규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극히 동정의 눈물을 불러일으켰지만 내가 잃은 그 돈만은 보상할 수 없었다.

더욱이 너나없이 도적으로 살아가는 그 사회에서 특히 사람의 생눈을 뽑는다는 강도지역에 와서 멍청하게 돈을 잃었다고 한심한 여자 아닌가 빈정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통인간은 감히 바라도 못보는 2만원의 뭉칫돈을 어느 누가 훔쳤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몇시간을 몸부림쳐 울었는지. 임신된 몸이라 배가 끊어질 듯 아팠고 목은 꽉 쉬어 말도 안나왔다. 아, 내가 무슨 실수를 했을까 하고 안타까움 속에 모대기던 나는 문뜩 나도 훔치자, 내것을 잃었으니 나도 그만큼 훔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기운을 내어 일어섰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을 어떤 짐을 훔쳐야 내 돈만큼의 돈값을 보상할는지 알 수 없었고 누가 얼핏 봐도 인차 알리는 배뚱뚱이의 몸에 과연 제대로 도적질을 해내랴 싶어 떨리는 다리가 후들거려서 그 일도 할 수가 없었다. 30해동안 살면서 남의 것이란 파 한뿌리도 훔쳐보지 못한 내가 감히 남의 물건을 도적질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헛된 꿈이었다.

나는 끝내 잃은 돈 때문에 정신나간 여자의 형색으로 집에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으므로 영양실조에 걸렸던 아버지가 그토록 먹고 싶다는 옥수수밥 한 그릇도 잡수어 보지 못하고 환갑을 금방 앞둔 7월 15일 세상을 뜨셨으며 뒤이어 나의 어린 딸이 또 영양실조에 쓰러지는 피맺힌 사연을 안아왔다.

나는 지금도 그 때의 돈 생각을 하면 터져오는 심정을 억제할 수가 없어 마음 괴롭기 끝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그때 받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도 큰 것 때문이었고 상처는 아물어도 그때의 그 아픔이 너무도 생생히 기억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 다음에는 제 1장 -2 편- " 이것이 사람사는 세상인가"를 연재합니다


죽음에서 영생으로(탈북여성 수기 - 2)

※ 98.7 탈북하여 중국에 은신중인 탈북여성이 북한의 참상과 탈북후 기독교인이 된 계기를 집필한 수기를 연재합니다.(집필자의 신변보호를 위해 인명 및 지명 등은 삭제하였음)


제 1 장 - 2 편 - 이것이 사람 사는 세상인가

내가 돈을 잃고 정신나간 여자의 행색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집 또한 눈뜨고 바라 볼 수 없는 참혹한 지경에 놓여 있었다. 꿈에도 그리운 남편이 그토록 무서운 전염병 파라티푸스에 걸려 사람도 제대로 분간 못할 형편이었으니…

후에 알고 보니 탈북자들이 하루에도 수십명씩 잡혀 들어와서 그들의 식량을 감당못하겠다고 감옥에서 하루 한끼씩만 먹였다는 것이다.

배가 고파 중국 땅으로 건너간 사람치고 건강한 사람도 없거니와 아무리 장사라고 해도 하루 한끼 먹고 병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남편이 감옥에 붙잡혀 있는 20일간 굶어 죽고 열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 그렇게도 많았다는 것이다.

결국 그 속에서 남편도 영양실조에 열병까지 겹쳐 다 죽게되자 죽어도 나가죽으라고 감옥에서 내놓았다는 것이다. 이 열병은 말 그대로 열이 심하고 영양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감염되었는데 심한 경우 말을 듣지 못하고 또 말도 하지 못했으며 대소변도 받아내야 했다.

그때 북한에서 이 열병에 걸리지 않았던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많은 사람들이 이 무서운 열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었으며 두세번 재차 감염되었던 사람은 보통인간과 구별되는 멍청이가 되어 버렸다.

나는 집 식구들에게 차마 돈을 잃고 온 내용을 말할 수 없었다. 영양실조가 심한 아버지는 온몸의 살가죽이 터지도록 팅팅 부어 있었고 아래 성기는 밥사발 만큼 부풀어 올라서 속옷도 입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자주 얼굴을 찡그리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참을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을 느꼈으며 인차 영양을 회복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온 집안이 병자 투성이인데다 딸마저 정신나간 모양을 하고 집에 온 것을 본 어머니는 "다 죽었구나, 영감도 사위도" 하고 절망을 토해냈다.

그러나 가난이란 무엇인지, 굶주림의 고통이란 무엇인지를 알 수 없는 철없는 두 어린 것은 그래도 엄마가 왔다고 내 곁으로 바싹바싹 다가들며 "엄마 먹을 것 안가져왔나. 나 배고픈데 할머니가 밥 안줘" 하고 삐죽거린다. 나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굶주림을 참을 수 없어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그 돈을 잃지 않았다면 지금쯤 온 집식구가 기쁨에 웃고 있을 게 아닌가. 나는 급히 빤쓰 속에 넣었던 남은 3천원의 돈으로 1kg에 50원하는 강냉이를 서너키로 사가지고 껍질채로 죽을 쑤어 식구들을 먹였다.

모두들 정신없이 그릇을 비웠지만 남편은 서너숟갈도 못넘기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열이 40도를 올라가고 입안은 너무도 헤져서 눈뜨고 보기가 끔찍했다. 게다가 몸에서 열이나니 어디서 그렇게 큰 이들이 번식되어 나는지 나는 기겁을 했다.

원래 숱 많고 까마반지르 하던 남편이 머리까락에 씨를 뿌린 것보다 더 다닥다닥 서캐가 붙어 있었고 몸에는 보리알 만큼씩 디글디글한 왕이들이 살판을 만났다고 이리저리 쏘다녔다. 이가 오죽 많고 많이 잡아죽였는지 내 어린 딸이 고사리같은 손으로 방바닥에 대고 이 죽이는 흉내를 낼 지경이었다.

속담에 "가난하면 이 풍년을 만난다" 더니 먹지도 못할 벌레들까지 불어나 가난하고 쪼들린 내 집의 흉을 더했다. 그러나 굶주림과 가난의 고통은 내 집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집을 떠나 있던 40일간 나의 동네 집은 물론 북한 땅 곳곳마다에서 내 가정과 같은 아니면 더 혹심한 불행을 당했는데 내가 사는 집 동네만 보더라도 과연 이것이 사람이 사는 동네인가 싶을 정도로 통탄할 지경이었다.

굶주림으로 남편을 잃은 어느 한 과부는 며칠을 굶었는지 정신이 돌아서 3살 난 자기 아들을 개로 착각하고 잡아 먹었으며 개성집이라고 불리는 집에서는 올망졸망 다섯 아이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당 간부네 무성한 감자밭을 뒤졌다가 집주인에게 붙잡혀서 그 자리에서 한 아이는 맞아 죽었다.

또 어떤 집에서는 신의주에서 조선사람들의 피를 사간다는 말을 듣고 온 가족이 피를 팔러 떠났다가 열차사고로 집에도 못오고 무리죽음을 당했으며 누구네 아버지는 농장에서 덜익은 봄보리를 잘라 먹었다고 군중재판을 당하고 잡혀갔고 또 어떤 가정은 온 가정이 쥐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등 온통 죽었다는 소리, 밤을 새고 나면 그저 사람 죽었다는 소리뿐이었다.

신의주에서 동선과 밀가루를 바꿔준다고 공장과 기업소의 기계설비를 다 뜯어내고 한창 생산에 가동해야 할 전동기에서 밤중에 아이들이 동 부속품을 뽑아 밀가루와 바꿔먹었으며 가정의 알루미늄 가마, 알루미늄 버찌, 심지어 텔레비전 안테나까지 서로 훔쳐서 신의주로 가지고 갔다.

어떤 집은 밤에 알루미늄 가마를 모두 뽑아가서 끼니를 끓이지 못하고 있었고 도적질을 할 수 없는 늙은이들과 부녀자들은 산에 올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표피를 말끔히 벗겨 내여 7월의 푸른 산을 누런 갈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산뿐 아니라 풀이라고는 그게 토끼풀이든 돼지풀이든 닥치는대로 뜯어먹고 뽑아먹어서 평양시외의 넓은 들판과 길옆은 김을 매놓은 것처럼 깨끗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말하기를 "우리가 뭐 사람이냐, 짐승이지. 짐승도 제일 천한 짐승이다" 라고 하면서 국가에서 5년동안 식량공급을 하지 않는 통에 사람의 속내장이 만능분쇄기가 되었다고 한다.


내일이야 어떻게 되든 오늘부터 살고 볼 판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최대의 욕망이며 소원인 것이다.


이 시각 북한에 있을 철없는 4살짜리 내 아들이 내용도 모르고 흥얼거리던 타령소리가 생각나 여기에 적어 본다.

" 어머니 튀기떡(강냉이 변성가루) 해줘요"

" 강냉이가 어디있니"

" 없으면 꾸어다라도 해줘요"

" 꿔먹으면 빚 받으러 온다"

"그럼 떡 해먹고 달아나요"

" 먹고 죽으면 한이 없대요"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는 이 소리는 얘들뿐 아니라 젊은 청년들 속에서도 잘 불려지고 있다.


※다음에는 제 1 장 -3편- "갓난아이를 잃고"를 연재합니다.

죽음에서 영생으로(탈북여성 수기 - 3)


※ 98.7 탈북하여 중국에 은신중인 탈북여성이 북한의 참상과 탈북후 기독교인이 된 계기를 집필한 수기를 연재합니다.(집필자의 신변보호를 위해 인명 및 지명 등은 삭제하였음)






제 1 장 3 편 갓난아이를 잃고

1998년 여름 어느날 남편과 나는 두번째로 중국땅을 밟았다. 열병을 앓고 난 뒤 영양회복을 하지 못해서 곧은 길을 걸어도 자꾸 넘어질까 하는 남편을 이제는 나 자신의 몸도 가늠키 어려운 임신 8개월의 몸으로 부축한다는 것이 너무 힘겨워 나는 중국 땅을 찾아오는 동안 줄곧 울면서 왔다.

멀고 험한 산길 200리를 울며 불며 고모의 집을 찾아왔으나 고모는 반가움 대신에 어쩌자구 자꾸만 찾아오는가, 그러다 내 집에서 애를 낳을 작정인가고 미리 근심부터 앞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고모의 말대로 나는 다음날로 온몸의 아픔을 느끼며 감당 못할 출혈을 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니 뜻밖에도 태아가 배속에서 잘못 됐으니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지 않으면 임신부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하면서 수술비 500원을 준비하라고 했다.

고모는 50원도 없는데 500원을 어디서 구하느냐고 주저앉았고 정신이 가물가물 흐려지는 나를 지켜보던 남편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의사의 다리를 붙잡고서 "선생님, 살려주시오. 불쌍한 내 아내를 살려주시오"하고 애원했다.

남편의 마르고 앙상한 얼굴과 냇물처럼 흐르는 구원호소의 눈물 앞에서 산과의사는 이상함을 느꼈는지 북조선 사람이 아닌가고 물었다.

남편이 옳다고 산길 200리를 걸어 오자니 이 지경이 됐노라고 목멘 소리를 하자 불쌍한 북조선 사람을 살려주자며 산과의사들이 팔을 걷고 나서는 것이었다.

중국 의사들의 수고와 뜨거운 인정속에 나는 수술을 하지 않고도 무사히 순산할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건강한 딸 쌍둥이였다.

산과의사들은 올해 처음으로 딸아이를 받았다고 너무도 예쁜 딸이라고 기뻐 뛰었지만 나는 기쁨보다도 아이를 낳은 근심이 태산같아 숨이 막혔다.

집에 두고 온 4살, 2살 오누이도 있는데 이 핏덩이 쌍둥이를 과연 어떻게 키운단 말인가. 그것도 아직 배속의 온도와 충분한 영양을 요구하는 8개월 조산아였으니...

산과의사들은 쌍둥이를 내가 바라볼 수 있게 내 옆에 나란히 뉘여 놓았지만 나는 그 두 어린 생명을 쳐다보기도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냥 울었다.

아, 무슨 놈의 거센 팔자를 타고났기에 나이 30도 전에 자식 4명을 낳았을까.

있는 자식도 못먹여서 이 중국에까지 동냥을 왔는데 어쩌자고 이렇게 쌍둥이까지 낳았단 말인가.

결국 중국땅에 왔다가 나중엔 핏덩이 어린 것만 하나씩 안고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우는 애들 젖먹일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의 근심 많은 심정을 알길 없는 이 병원의 기술부원장과 조선족 의사들은 아이가 참 귀엽다고 많이 먹고 아이젖을 많이 먹이라고 꿀, 우유, 닭알을 꾸려 가지고 왔다.

나는 갓난아이 위로 애 둘을 낳았지만 이 아이를 낳았을 때처럼 닭알과 꿀, 우유를 먹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첫애를 낳았을 때는 94년도 김일성이 금방 죽은 뒤 10월이었는데 그때 벌써 식량사정이 곤란하여 배급을 주지 못했으므로 나는 미역국 대신에 누런 시래기 소금국을 먹었고 해산후 한주일만에 강냉이죽을 먹었다.

그런데 96년도 두번째 애를 낳았을 때는 해산후 한주일부터 쓰디쓴 칡뿌리 죽을 먹었다.

그러기에 나를 간호하던 시어머니는 해산한 며느리에게 시꺼멓고 씁쓸한 칡뿌리 죽을 대접하는 것이 민망하였던지 애를 안고 하는 말이 "너는 젖도 쓰겠구나. 어미가 쓴 죽을 먹는데 젖이라고 달겠니"하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아이를 낳은지 며칠후 산과의사들은 아이의 새 옷을 사가지고 와서 입혀주었고 친히 삼륜차까지 태워서 고모의 집에 보내주었다.

그런데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북조선 여자가 중국에 와서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 온 주변에 퍼져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모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남편과 나는 이 사실이 중국 당국에 알려질까봐 몹시 두려웠다.

처음에 중국에 왔을 때 잡혔던 일 때문에 또다시 잡힐까봐 얼마나 무서운지밖에 나가기도 무척 근심되었다.

그래서 궁리하던중 고모의 소개로 고모집에서 근 100리 떨어진 과수원에 가서 잠시 피신해 있기로 했다.

사과나무가 1,000그루나 되는 과수원 주인집에서는 우리 부부의 눈물겨운 사연을 듣더니만 한달동안만 과수를 지켜주면 천원의 돈을 지불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남편과 나는 기쁘기가 한량없어 다음날로 그 과수원으로 달려갔다.

8월의 한여름이었지만 나와 남편은 과수원의 풀베기와 약치는 일을 열심히 했다.

어린 딸을 과수막에 눕혀놓고서 낮에는 찌는 듯한 더위와 밤에는 까맣게 모여드는 모기떼와 씨름하며 남편과 내가 어떻게든 30일이란 날짜를 채우려고 이를 악물고 애쓰고 있을 때 별안간 나의 어린 딸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8달 태아로 되기까지 온갖 고생과 엄청난 시련을 겪은 것이 아이의 생명을 가져간 원인으로 짐작되지만 하나의 생명으로 인간세상에 왔다가 부모의 낯도 익히지 못하고 먼저간 나의 딸이 가여워서 나는 슬픔이 몰려오는 저녁마다 인적없는 과수원에서 불은 젖을 짜 버리면서 한없는 눈물을 흘 렸다.

더욱이 날마다 눈에 띠게 익어가는 사과알을 볼 때마다 사과같이 동그랗던 딸의 모습이 어려와서 더 이상 일할 용기를 잃었으며 온몸의 힘과 정신을 깡그리 앗아간 듯한 절망속에 넋을 잃었다.

귀여운 어린 딸을 잃은 나는 그 때에야 비로소 "남편이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 사람들의 말속에 여성 본능의 모성애가 집착되어 있음을 절통하게 실감했다.

이 과수원에 온지 10일째 날,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남편과 나는 그 과수원을 떠나왔다.

부모보다 먼저간 자식은 불효자식이라고 반듯하게 눕히지도 못하고 땅에 엎어서 묻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이 아낙네의 얼굴에서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 못할 것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죽음에서 영생으로(탈북여성 수기 - 4)

※ 98.7 탈북하여 중국에 은신중인 탈북여성이 북한의 참상과 탈북후 기독교인이 된 계기를 집필한 수기를 연재합니다.(집필자의 신변보호를 위해 인명 및 지명 등은 삭제하였음)

제 1 장 4 편 봄이면 돌아오리다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며는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내가 봄이면 꼭 다시 돌아온다며 어머니 곁을 떠나온 것은 그해 가을도 다 가는 10월말이었다.

남편과 내가 과수원에서 일한 몇푼의 돈을 쥐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뜨셨고 어머니도 아버지의 뒤를 따르려는 듯 허약한 몸에 배 복수가 겹치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의 두살배기 어린 딸마저 영양실조에 걸려서 눈만 뎅그렁하니 남아 있었다.

중국에서는 쌍둥이를 잃고 또 집에서는 아버지를 잃고 남은 집식구들 마저 죽음의 지경에 놓여 있었으니 복은 쌍으로 안오고 화는 홀로 안온다고 이거야말로 불행의 연속이었다.

내 동생은 "누나, 왜 이제야 왔어. 아버지가 누날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하고 사나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 아버지 왜 벌써 가셨어요. 환갑상은 못해드려도 아버지 즐기시는 술 한잔이라도 부어드리려고 했는데 이 딸의 심정도 모르시고 왜 이리도 일찍 가신 겁니까?

그토록 잡숫고 싶다는 강냉이밥 한그릇 따끈히 못해 드리고 그리도 좋아하시는 술 한잔 못 부어드린 나의 불효도와 죄책감에 나는 가슴이 찢기여 하늘땅이 한데 뭉쳐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만 그쳐라, 영감도 나도 살만큼 살았다. 늙은 것이야 땅에 묻으면 되겠지만 이 철없는 두 목숨이야 살려야 하지 않겠니. 영감을 내 눈앞에서 굶어 죽이고 너희들까지 죽인다면 난 고통으로도 더 살지 못한다. 그러니 어서 애들 데리고 살길을 찾아 떠나거라"

배 복수가 심하여 온몸이 장독같이 부은 어머니는 자신의 병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짐작하셨으며 살아서 더는 집식구들의 죽음을 보지 않으려는 강한 결심을 하신 것이다.

더욱이 30년 세월을 다툼한번 없이 살아온 정깊은 아버지를 다른 병 아닌 굶주림으로 잃었기에 그 처참한 주림의 결과가 무엇을 가져오는 것인지, 너무도 명백했기에 따뜻한 혈육의 보호와 정성스런 간호가 필요되는 병중에도 불구하고 극히 떠날 것을 요구하는 어머니였다.

나는 동생과 함께 돈이 없어 관대신 헌 가마니 한 짝으로 묻었다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서 앞산에 올랐다.

금방한 묘임을 알리듯 풀 한포기 없는 아버지의 흙무덤 앞에 나는 20살 남동생과 꿇어 앉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생전에 즐기시던 도토리술을 사발이 넘치게 부어드리고 그리도 외우시던 강냉이밥 대신 하얀 햅쌀밥을 제돌 위에 챙겨드리며 흐르는 눈물과 함께 두팔 벌려 흙무덤을 끌어안았다.

아버지, 아버지 살아 계실 때 못해드리고 이렇게 영영 잠드신 오늘에야 차려드린 이죄 많은 불효자식을 용서하세요.

그리고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한 것도 용서해 주세요.

끝없는 후회와 자책감에 젖어 온몸의 울음을 다 토해내자니 살아계실 때 아버지께 못다한 불효도와 철없이 애를 태우던 나의 지난날이 안겨왔다.

철없던 인민학교 시절 아버지의 입당난에 "비"자를 써놓고 왜 아버지는 당원이 아닌가고, 무슨 잘못이 있어서 대학을 나오고도 당원이 못 되었는가고 끈질기게 물었을 때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짓던 아버지.

학교 졸업증에 희망난 역시 비당원 아버지로 하여 내 꿈을 싣지 못했다고 그리도 원망스럽게 토달거렸던 나의 지난 과거를 생각하며 이제 세상을 뜨신 아버지를 앞에 대하고 보니 철없던 시절의 부끄러움만이 나의 가슴을 두드렸다.

나의 아버지는 1938년 중국 길림성 연변에서 출생하여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이 중국에서 보내다가 문화대혁명때인 1962년 2월 두만강을 건너 귀국하셨고 귀국하여 평양의 공장과 지방의 직장에서 지도원으로 사업을 하셨으나 귀국민이라는 이유로서 끝내 입당하지 못하고 남모르는 가슴속 아픔을 지니고 계신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가까운 혈육도 없는 북한 땅에서 굶주림으로 잃었으니 내 마음은 찢는 듯 아팠다.

아버지, 부디 편히 누워 쉬세요. 그리고 이 딸이 아버지를 찾아 다시 오는 날을 기다려 주세요. 그 때에는 아버지를 다시 잘 모셔드릴테니 시름놓고 그날까지 편히 쉬셔요.

눈물로서 맹세하며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어머니를 추켜세워 보려고 남편과 함께 별의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이 60세로서 젊은이 같은 건강을 되찾을 수가 없었으며 전혀 차도가 없었다.

어머니를 붙잡고 열흘, 보름동안 지체하는 동안 내 어린 딸은 점점 더 건강이 나빠졌으며 아예 서지도 못하고 고개도 못들었다.

나는 어머니도 못살리고 딸도 죽일 것만 같아 제정신이 아니었다.

갓난애를 잃고 그 딸마저 잃는다면 나도 차라리 죽음을 택할 만큼 자식에 대한 애정이 기울어져 나는 다음날로 떠날 결심을 내렸다.

10월의 쓸쓸한 가을바람은 의지할 곳 없고 보살펴 줄이 아무도 없는 험한 세상에 홀로 어머니를 두고 가는 나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했다.

그러나 인생의 갖은 풍파를 다 겪으신 어머니는 이 세상의 눈물을 다 흘리셨는지, 아니면 떠나는 자식들 앞에서 애써 눈물을 참으시는지 눈시울하나 붉히지 않고 아들, 딸, 사위, 손주 다섯을 떠나보냈다.

"엄마, 기다려요. 내 꼭 다시 올 게. 어린애 살리고 엄마 데리러 올게. 다음해 봄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가던 길을 몇 번이고 다시 돌아와서 어머니께 맹세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불효 막심한 자식이어서 죽음을 앞둔 어머니 곁을 그리도 쉽게 떠나올 수 있었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더욱이 봄이 오면 어머니께로 다시 오겠노라 다짐해 놓고 약속한 그 봄이 다시 돌아와도 나는 아직 내 어머니를 찾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그러나 언어도 안통하는 이 중국땅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네 식구의 생명 또한 너무 귀중해 나는 오늘까지도 나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풀지 못한 한을 간직하고 있을 뿐 내 어머니 계신 북한 땅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를 찾아 못가는 내 가슴에는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애통함이 바다를 이루고 있다.


※ 다음에는 제 1장 5편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연재합니다.



죽음에서 영생으로(탈북여성 수기 - 5)

※ 98.7 탈북하여 중국에 은신중인 탈북여성이 북한의 참상과 탈북후 기독교인이 된 계기를 집필한 수기를 연재합니다. (집필자의 신변보호를 위해 인명 및 지명 등은 삭제하였음)

제 1 장 5 편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머니와 작별한 내집식구 네명은 살얼음진 두만강을 건너 중국 고모의 집에 찾아갔다. 그러나 고모가 반가워할리 만무했다.

아버지를 굶겨 죽이고 병난 어머니를 홀로 두고 온 너희가 사람의 자식이 옳으냐는 것이다.

그 때의 환경에서 부모를 살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인 희생, 맹목적인 효성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남편과 내가 그 저주로운 북한 땅을 떠나지 않았던들 내집식구 네명은 꼼짝없이 굶어죽고 말았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고모는 내집의 이러한 사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서 빨리 다른 거처지로 옮겨갈 것을 어떻게나 요구하는지 나는 서럽고 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때 나의 두살배기 어린 딸은 영양회복이 안되어 잠결에도 먹을 것을 찾았고 눈을 뜨면 배가 터져라고 마구 밥을 퍼먹어 댔는데 먹은 후에는 소화를 못시켜서 토하고 설사를 하곤 했다.

그렇잖아도 보기 싫은데 올망졸망 두 어린 것의 주절대는 소리가 듣기 싫다고 고모는 아침에 집을 나갔다가 밤중에야 들어오곤 했는데 우리로 하여금 더이상 고모의 집에 있을 수 없게 했다.

어디로 갈 것인가. 11월의 연변 날씨는 벌써 부슬부슬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고 변변한 솜옷 하나 걸치지 못한 우리의 차림으로는 아무데도 갈 수가 없었다.

그때 고모의 옆집에 사는 할머니가 내집 식구의 기막힌 사연을 헤아리고 인정을 베풀어 주었다.

할머니는 내 가족을 자기 집에 데려다 놓고 옷도 갈아 입히고 애들에게 맛있는 음식도 해주면서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기운솟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 어느 산속에서 나무 찍는 일꾼을 쓰겠다는 곳이 있으니까 그 곳에서 너희 3명이 겨울동안만 부지런히 일하면 다음해 봄에는 집을 얻고 가정이 살 수 있다는 방도를 하나하나 찾아주는 것이었다.

너무나 고마워 나는 그 할머니 앞에 쓰러져서 어린애 마냥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할머니가 전화연락을 하여서 그 채벌대 주인이 왔다. 그런데 애들은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하여 난처한 사정에 빠졌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다고 고모의 집에서부터 설사를 하던 어린 것이 급성 대장염으로 넘어가서 병원 입원치료를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가뜩이나 바싹 마른 딸애는 연속되는 대장기의 배출로 눈만 커다랗게 남아서 가냘픈 울음을 울었고 어린 자식을 지켜보는 남편과 나의 눈에서는 집없는 나그네의 설움 많은 눈물이 고랑을 짓고 흘렀다.

나라 없고 돈 없는 기막힌 인생을 탓하고 있을 때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이웃 동네에 사는 어느 젊은 부부가 우리를 찾아왔다.

애를 앉아서 죽이기보다 자식이 없는 자기들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죽는 일이 있어도 내 품에서 못 가져간다고 했고 남편은 딸을 죽이느니 차라리 남의 집에 가서라도 잘 자랄 수 있게 하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부모가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서 어떻게 자식을 남에게 줄 수가 있느냐고 울며 매달렸지만 남편이 결국 승인하는 것으로 불쌍한 어린아이는 남의 집에 가 버렸다.

나는 엄마를 안떨어지겠다고 발버둥치는 어린 것을 보내면서 "어린 것아, 용서해라. 이 엄마가 무능하여 다 키운 너를 남의 집에 보내는구나. 가서 부디 잘 자라거라. 이 다음에 엄마가 꼭 너를 다시 찾으마"하고 진한 맹세를 했다.

남은 4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산속 채벌대에 찾아가니 우리 식구 말고도 북조선 부부가 먼저 와 있었다.

그들은 우리보다 1년 먼저 중국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는데 먹고 자고 할 뿐 일한 값을 한푼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처럼 할 수가 없었고 또 할머니의 사정으로 매달 한사람당 300원씩 받기로 했다.

나는 밥을 지었고 남편과 동생은 산에 올라 찍은 나무를 끌어 내렸다.

눈이 오건 비가 오건 어김없이 아침 7시에 산에 올라 아름드리 큰 나무를 20통 끌어내리고 나면 보통 두세시가 되었는데 깊은 눈속에서 땀을 흘리며 일한 이들이 차림새는 눈과 땀에 젖어서 말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어려운 고비를 이겨내면 우리도 얼마든지 내집에서 살 수 있다는 부푼 기대를 안고 고난의 겨울을 지탱해갈 결심으로 일을 열심히 했다.

또한 날마다 이밥에 고기국을 먹으니 일의 힘겨움 같은 것은 능히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건강도 좋아졌다.

그러나 그 한적하고 풍족한 생활의 여유속에서도 우리 북조선 사람의 신분은 이 중국 땅 가장 하찮은 삶의 최하층 세계에서 사는 인간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때가 있었으며 북한사람이란 배가 고파 남의 땅을 밟은 불법침범자라는 이유로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자존심을 손상당할 때가 너무도 많았다.



그 때마다 나는 "나라없는 백성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는 옛 조상들의 말을 떠올렸고 이 고통이 나 하나, 내 가정 하나가 당하는 고통과 멸시가 아닌 처절한 고뇌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그 땅 북한땅을 떠나온 수많은 탈북자들이 뼈아프게 가슴에 새기고 있는 민족적 멸시였음을 현실로서 체험했다.



우리집 식구가 그 곳에서 한달 남짓 일을 하고 있을 때에 현에 갔던 채벌대 주인이 우리를 찾아왔다.

내용인즉, 지금 중국 당국에서 북조선 탈북자를 잡으라는 포고령을 내리고 이 산속도 곧 수색할 예정이니 빨리 피신하라는 것이었다.

집을 사서 살만큼의 돈을 마련하지도 못했는데 불우한 내집 식구들의 운명은 또 다른 거처지로 갈 것을 요구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와 함께 있던 북한부부는 또 어느 깊은 산속에 들어가겠다며 울면서 떠나갔고 우리도 일한 값을 받고서 발길이 닿는 대로 채벌대를 떠나왔다.

채벌대 주인은 헤어지기가 섭섭하다며 여기 수색이 끝나면 다시 오라고 거듭 당부했지만 내일 일을 기약할 수 없는 우리의 형편에서 바른 대답이 나올 수가 없었다.

한겨울 4살짜리 어린애를 앞세우고 갈 곳이 없는 우리는 할 수 없이 또 할머니의 집을 찾아 들어갔다.

혹시 누가 우리를 살펴볼까봐 날이 어두워서야 들어간 우리는 그간 있은 일을 이야기하면서 또 한번 도움을 간청했다.

인정깊은 할머니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수소문하더니만 이 연변엔 북조선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피신해 있을 곳을 찾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어디 한번 기독교회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남편과 나는 기독교란 말에 기겁을 했다.

그것은 북한에서 기독교가 가장 무서운 종교, 인간의 바른 정신을 좀먹는 거짓된 단체의 한 소속이라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며 인민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미국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때 인민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는 미국 선교사가 황해도 어느 과수원을 가지고 호화롭게 살고 있었는데, 그 과수밭을 지나던 어린 소년이 땅에 떨어진 사과 한알을 줏어 먹었다고 그 소년의 이마에 청강수로 도적이란 글을 새겼다고 했다.

그 때의 어린 기억으로도 선교사란 정말 악독하고 무서운 존재로 여기고 있었기에 기독교란 말이 마음에 동할 수가 없었다.

남편과 내가 그냥 망설이는 것을 지켜본 할머니는 "에구, 기독교가 얼마나 좋다구 그리 무서워하냐. 가봐라, 꼭 너희를 살려줄게다."하며 우리 부부를 안심시켰다.

남편과 나는 갈 마음이 없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내나라 내 땅도 아닌 남의 나라 타국 땅에 와서 믿고 살만큼 가까운 혈육도 없는 우리 형편에서 이것저것 가릴 것이 못되었으니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무작정 떠났다.

한가지 기대한 것은 우리 같은 불쌍한 탈북자들을 제몸같이 따뜻이 보살펴 준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오직 하나의 믿음 뿐이었고 내집 식구 4명이 이제 더는 헤어지지 않고 따뜻한 가정에서 강냉이죽이라도 마음놓고 먹을 수 있는 안식처, 피난처만을 애타게 소망했을 뿐이었다.


※ 다음에는 제 1 장 6 편 "이 길이 내나라가 사는 길이다"를 연재합니다.


죽음에서 영생으로(탈북여성 수기 - 6)


※ 98.7 탈북하여 중국에 은신중인 탈북여성이 북한의 참상과 탈북후 기독교인이 된 계기를 집필한 수기를 연재합니다.(집필자의 신변보호를 위해 인명 및 지명 등은 삭제하였음)






제 1 장 6 편 이 길이 내나라가 사는 길이다



우리 4식구가 기독교회를 찾아가니 그 날은 일요일이어서 예배드리려고 온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옛날 건물 그대로인 벽돌집 가옥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서로 웃고 인사를 하면서 흥청대었는데 난생처음으로 예배당에 들어온 우리는 영문을 몰라서 도로 밖으로 나와 버렸다.

3부 예배를 끝마치고 오후가 되어서야 이 교회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는데 목사님을 만난 우리는 깜짝 놀랐다.

그래도 목사라고 하면 머리도 희끗희끗하게 희고 옷도 여느 평민의 옷이 아닌 (지금 목사님의 까운) 옷을 입고 거룩하게 앉아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풍채좋고 인자한 젊은 분이 양복차림의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기 때문이었다.

목사님은 내 가정이 겪은 피눈물나는 가슴저린 사연을 주의깊게 들어주시며 잘 왔다고, 온 가족이 모두 다 왔으니 얼마나 기쁜가고 인정넘치는 뜨거운 말씀을 해주셨다.

그날저녁 목사님은 내집 식구를 식당에 불러 주셨으며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껏 먹어보지 못한 좋은 음식을 대접시켰으며 저녁 예배에 온 가족이 참석하도록 조치를 해주셨다.

나무십자가가 높이 달린 교회당 안에서 나와 내집 식구는 30년만에야 그토록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만왕의 왕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내 생명이 어디로부터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를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인자한 목사님이 어찌도 은혜스런 설교말씀을 하시는지 나는 지금껏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좋은 말씀을 들어 보았다.

더욱이 내 마음을 감동시키고 나를 울린 것은 찬송가

"천부여, 의지 없어서"였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이 찬송이 어찌나 그리도 마음에 꼭 맞았는지 예배가 끝나도록 나는 그냥 엎드려서 울었다.

오, 주여 나를 받아주소서. 나 지금껏 당신을 모르고 그 악한 세상을 헤매다가 부모, 자식을 다 잃고서야 이렇게 왔습니다. 이제 남은 내집 식구들이라도 당신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소서.

그날밤 늦게까지 우리 네사람은 목사님으로부터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에 대한 산증거인 성경책을 각각 한권씩 받아 안았으며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다음날 목사님은 우리 식구가 살 수 있는 생활비품을 모두 새것으로 마련해 주었다.

시내에서 10리쯤 떨어진 조용한 곳에 집을 잡은 우리 식구들의 기쁨은 하늘을 날 것 같았다.

그것은 어느 한 인간의 동정과 인정이 아니라 거룩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국 땅에서의 안정된 생활에 대한 더욱이 나 같은 하찮은 인간에게 한량없이 베푸시는 우리 주님의 크신 사랑앞에 삶의 무한한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회 성도님들이 날마다 찾아와서 불쌍한 북한 동포를 이 중국 땅에 보내주셨다고 꿇어앉아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을 보니 친 혈육도 주지 못한 대해 같은 사랑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그 고마움에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런지 송구스러웠다.

또 교회에서나 길거리에서 성도님들을 만나면 그보다 더 기쁜 것이 없었고 형제, 자매들 모두가 내집 식구를 주님의 사랑으로 진실하게 대해주는 것을 보고 믿음, 소망, 사랑중에 사랑을 제일로 간직하는 기독교의 신자들이야말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화신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국땅에서의 친혈육도 내 가정을 외면하고 가는 곳마다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받아온 내 가정이었는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참소망을 안겨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야 어찌 남들과 같이 따뜻한 집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가 있었겠는가.

밤이 깊어 모두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집을 두고도 한지에서 밤을 새우며 따끈한 국 한그릇 먹을 수 없었던 우리의 지난 과거가 자꾸만 생각 나 남편과 나는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더욱이 끼마다 흰쌀로 밥을 지을 때면 통강냉이도 없어서 어린 두 자식의 배를 굶겼던 일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굶어서 세상 뜨신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영양실조에 불치의 병까지 겹쳐 함께 오지 못한 어머니 생각에 밥상 위에 차려진 흰 이밥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그때 홀로 두고 온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여 밤중에 누워 읊어본 자작시가 있다.



눈같이 하얀 쌀로 밥을 지을 때면
나도 몰래 쏟아지는 눈물, 눈물입니다.

내 밟은 이 나라는 흰 쌀밥도 싫다 하건만
내 어머니 계신 그편 북녘땅은
어찌하여 통강냉이도 없어서
굶주리는 것입니까.

가슴이 아픕니다.
이 나라에선 내 어머니와 같은 분들도
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는데
어찌하여 어머니는
어찌하여 내 어머니는
그리도 늙으시고 병드셨단 말입니까.

이 딸은 기억합니다.
진눈깨비 흩날리는 그 어느 날
삯일로 벌어오신 강냉이 한 되를
내려놓으며
그리도 태평스레 잠드셨던
어머니의 모습을...

아, 울분이 터집니다.
내 건너선 이편 땅은
한갓 미물인 짐승들도
알찬 낟알더미를 축내며 살찌우는데
내 어머니 계신 내나라 북녘땅은
어찌하여 쭉정이도 없어서
굶주려야 합니까.
어머니, 내 어머니.
끼마다 마주하는 흰 쌀밥은
두고 온 어머니 생각에
이 딸의 더운 눈물만을 더해 줍니다.



진정 그 북한 땅을 떠나올 때는 오직 살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고 살 수 있다는 신념은 남편도 나도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집식구 네 영혼을 사랑하셔서 죽음에서 영생의 언덕으로 옮겨 주셨으니 주님을 영접한 내집식구들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1998년 12월 25일 이 날은 우리가 주님을 알고서 처음으로 맞는 성탄절이었다. 우리 식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교회를 떠나지 않고 예수 탄생일 밤을 기념했다.

교회당은 교회 성가대에서 준비한 찬송과 율동으로 예수님을 경배했으며 교회마당에 심은 푸른 소나무 가지마다에서도 성탄일을 기념하는 찬송곡이 울려나와 명절 분위기를 한층 돋구어 주었다.

교회신도 외에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까지 모여와서 교회당은 물론 교회 마당 끝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때 목사님은 이 기쁜 성탄의 밤에 믿지 않던 영혼들이 주님 품에 돌아올 수 있는 영광의 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처녀시절을 거의 시의 세계에서 보낸 나로 하여금 불현 듯 끓어오르는 심정으로 자작시를 읊게 했다.



세상살이 힘겨운 이 희망을 주고
병환에 시달린 이 고침을 주고
인정에 굶주린 이 사랑을 주는
예수를 알고서 울었습니다.

교당을 울리는 목사님의 설교는
사막의 청수마냥 타는 가슴 시원히 적셔주고
태산처럼 높이 쌓인 증오의 장벽은
봄눈처럼 깨끗이 녹아내립니다.

자신을 용서하듯 남을 용서하며
너의 아픔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교인들의 따뜻한 마음을 알았으며

간절한 소망과 진실한 약속을 향해
깨끗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는
선하고 착한 마음들이 날마다 늘어남을
보았습니다.

세상은 천태만상이라.
근심으로 웃음이 싫어진 당신이여.
불행으로 사랑을 놓쳐버린 나그네여.
세상이치 관계말고 교회로 나온다면
곡절많은 운명에서 그대 쉼을

얻으리니
힘겨운 인생살이 고개 길을
웃으며 넘으리라.



목사님께서 그 성탄절 밤에 내가 읊은 자작시가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다고 너무너무 기뻐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기간에 나와 내 가정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은혜를 생각할 때면 그때 읊은 나의 목소리가 너무도 빈약하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나의 표현이 너무도 모자라서 오늘까지도 주님 앞에 부끄러운 심정이다.

실로 나와 내 가정이 걸어온 길을 수록한다면 기쁨보다 눈물이 웃음보다 슬픔이 내 앞을 가릴 만큼 고통중의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나는 이 고통을 넘어서 내 인생의 가장 복된 십자가의 길을 찾았으며 그토록 내가 저주했던 내 조국 북한이 장장 반세기동안 하나로 합쳐지지 못한 요인을 알았다.

지금, 북한이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남한 동포들과 특히 중국 조선족들 속에서 통일문제를 운운하고 있지만 나는 확고히 믿는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 조국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하나님만 믿고 나갈 때 요단강이 갈라지고 여리고 성도 무너질 것이기에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내 가정의 신조는 이 세상 끝까지 나의 길이고 생명이고 구원인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내 나라가 사는 길도 이 길밖에 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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