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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렁길


<비렁길 4>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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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종희 조회 618회 작성일 24-03-0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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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빛 바다와 비렁길


잠잠하던 마음이 들썩인 건 연휴 하루 전 일이었다. "이럴 때 다리가 놓여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말은, 새벽 3시에 일어나 고향으로 직행하는 마음을 멈추게 하진 못했다.


급변한 날씨 예보를 지켜보며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어둠이 밀려나고, 잠깐 들른 휴게소 주차장 온도는 온몸을 움츠리게 한다. 무사히 바다를 건너 고향에 닿는다면, 며칠 섬에 갇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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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산의 텅 빈 도로와 백파가 일렁이는 바다가 눈에 들어오면서 시작된 불안은, 신기 선착장에 도착하고서야 멈춘다. 강풍으로 저녁 배가 끊긴다는 직원의 안내 멘트를 들으며, 거센 바람 길을 걸어 9시 10분 배에 오른다. 뒤따른 차량들 사이로 적지 않은 관광객을 쏟아낸 대형 관광버스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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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a18a105d2d3ed61eb1119cdf53ba9_1709868303_2683.jpg40여년 만에 만난 분홍 동백나무


섬에 도착한 우리는 매화와 유채가 간간이 손 흔드는 도로 위를 달린다. 서고지와 부도 다리 중간에 성큼 올라온 알마도에 얼굴이 환하게 벙글고, 꽃샘바람에 더욱 스산해진 고향집 마당에 들어선다. 낡아 삐걱거린 현관문을 열고, 흡입력 좋은 청소기로 구석구석 먼지들을 제거했는데 아직도 오전이다. 점심을 먹고 고향 언덕에 올라 쑥과 달래를 캐고, 유년의 숲 속에 은밀하게 숨겨둔 분홍 동백나무와 재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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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동 바닷가


밤늦게까지 으르렁 거리던 바람은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새벽뒤란 대숲은 꼿꼿하게 멈추었다. 오랜만에 든든한 아침을 먹고, 비렁길 4코스가 있는 학동 마을로 향한다. 도로변 보라색 대형 버스를 스치자마자 좁은 길을 따라 내려가는 탐방객들의 가벼운 발걸음이 보인다. 포구의 작은 가게는 많은 손님으로 들뜨고, 하늘의 깊고 푸른 원색이 자유를 얻었는지, 방파제 안과 밖의 바다는 온통 파랑의 천국이다. 이대로 물멍해도 좋을 것 같은데, 우리는 큰 바위 사이 철퍼덕 주저앉은 녹슨 닻을 뒤로하고 비렁길 4코스를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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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렁길 4코스 동백 꽃


때마침 역광이 머문 보리수나무와 작은 테크길을 지나 울타리가 이어진 숲길로 오른다. 오른쪽은 바다, 앞은 동백 터널이다. 겨울을 견뎌온 초록의 표피들이 아침 햇살에 찰랑인다. 동백 숲 우듬지에서 지켜보던 해님은 조금이라도 틈이 보일라치면 숲 속으로 들어와 흐린 먹색으로 나뭇가지 문양을 그려놓는다. 뽀르르릉 귀여운 새의 지저귐이 레가토로 이어지고, 갯바위를 타고 오른 파도 소리가 청량한 음계를 그리다가 멈추고, 멈추다가 이어진다. 이어지는 속도가 느릴수록 주변 풍경은 섬세하게 다가오는데, 갑자기 휴대폰 화면 속으로 노란 등대가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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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비렁길에 있는 모든 사물과 사람은 풍경이다. 하얀 포말을 매달고 소나무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는 어선도 풍경이고, 탐방객을 보호하는 로프난간도 풍경이다. 비렁길은 앞태 뒤태가 다 멋있다는 말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내 눈길도 풍경이고, 더 자세히 비렁길을 보고 싶은 내 마음도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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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반갑습니다~즐거운 여행되세요~마주 오는 사람이 놓고 간 다정이 마르기도 전에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더 이상 좋을 수 없다는 그들의 탄식이 탄산수처럼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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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끝 소나무를 스치자마자 소리도와 일종고지, 알마도가 들어온다. 그리고 건너편 아찔한 바위에 놓인 사다리통 전망대가 보인다. 일전에 영상으로 보았던 사다리통 주변 바위들이 생각나 절벽 가까이 다가서려다가 아득해져 멈춘다.

오른쪽에서부터 나로도, 곡두여, 무학도, 탕건도, 손죽도, 소거문도로 이어지는 섬들이 희미하게 들어온다. 청아한 날씨가 주는 선물을 오래오래 보고 싶지만, 걸음은 이내 가야 할 길로 방향을 돌린다. 비렁길 다운 길들이 이어지고 저 멀리 출렁다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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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통 전망대 


습이 마르지 않은 절벽 안쪽에 터를 이룬 솔이끼 동네를 스치고, 봄기운에 익숙해진 해국과 물곳 서식지를 스친다. 오랜 세월 화인이 된 돌이끼를 건너 돌계단으로 내려가자 등껍질이 쩍쩍 갈라진 소나무가 보인다. 한참을 서성이는 동안 그새  정이 들어버렸는지, 몇 걸음 떼지 않고 다시 돌아본다. 그런 머뭇거림에도 온금동(따순기미) 마을 터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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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들어서면 이곳을 지나는 수많은 사람들 마음을 갸우뚱하게 한 돌담이 있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 터는 사연도 많은데, 초분을 보호하는 낮은 돌담으로 머물다가 빈터인 채로 세월에 바래져 어둠의 기억이 지워졌을 때, 돌담은 몸집을 키워 마을을 지키는 해안 초소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돼지우리로 그 기능을 이었다는 이야기도 분분하다. 마을 위로는 잔디밭, 공동묘지, 다시랑으로 이어지고 학동, 공등산으로 이어지는 왼쪽에는 여전히 건재한 못동 마을이 있다. 그 옛날 잔디밭에서 뛰어놀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바다만 출렁이고 있었다는 선배 언니가 생각난다. 오랜 세월 잡목들이 번성해 바다와 숲 사이의 두려움을 다 지운것 같은데, 초여름이면 피어나던 나리꽃은 빼곡해진 소나무 덕분에 안부를 물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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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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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금동마을/
초분-> 해안초소->돼지우리로 사용 되었다는 100여년 역사를 간직한 돌담


앞집뒷집 정을 끌어안던 돌담들이 이제는 숲을 채우고 있는데, 마을 이름만큼 온순했던 이들이 이어놓은 길을 이렇게 쉽게 걸어도 되는지 문득 죄송스럽다. 따순기미 마을 추억이 머문 소나무를 스치고, 두꺼비 형상의 작은 바위에 머문다. “이 두꺼비 바위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집니다.”라고 써 둔다면 저 바위는 남아나지 않을 거라는 상상이 피식 웃음으로 손 흔들고, 어느새 나는 시누대 도열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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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누대 아치터널


왼쪽으로 살짝 틀면 시누대 아치 터널이 나오고, 심포로 가는 지름길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는 오른쪽 길을 따라 장구골 협곡 위에 놓인 출렁다리 데크계단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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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금동 전망대


여기도 온통 파랑이다. 파랑에서 기분 좋게 달려온 바람이 벼랑 끝 누런 띠풀들을 건든다. 부드럽게 살랑 이는 느낌이 감미롭고 따사로워 나는 한참을 멈추다가 숭숭 구멍 뚫린 출렁다리를 건넌다. 건너자마자 온금동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 앉아 비켜주지 않는 사람들 마음을 이해한다. 그 틈으로 걸어온 길을 돌아보다가 이내 등을 돌려 걷는다. 작은 솔밭 사이로 숲 속의 요새 같은 아담한 몽돌 밭이 보인다. 사진을 보고난 후 꼭 가고 싶었던 저 바닷가를 지척에 두고 고개를 돌려야하는 아쉬움에 마음이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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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동, 이장자리(끝자리), 영수밭밑, 사다리통전망대, 줄맨데, 부삭바구, 작은강정, 큰강정(못동해변), 따순구미, 장구골(출렁다리), 온금동전망대, 웃가람, 몽돌해변(청성머들), 노랑바구, 심포로 이어지는 이 계절의 비렁길 4코스,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될 뻔했던 우람한 백동백의 훼손은 그 나무를 기억하는 이들과 비렁길을 찾는 우리에게 너무 아쉬운 손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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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 노랑바구를 두고 방향을 왼쪽으로 튼다. 틀자말자 소나무 가지에 "머리조심" 하라는 글이 보인다. 순간 땅만 보고 가는 키 큰 사람들에게 느닷없이 반짝일 별이 떠오른다. 그래서 앞선 자리는 언제나 위험을 알리는 노랑등대 거주지여야 한다.

돌담이 무너질까 봐 씌어둔 녹청색 그물 위에도 세월이 누적되고, 직진한 우리 눈앞에는 처음부터 줄곧 따라온 싱그러움이 출렁인다. 그 물빛에 다시 눈이 멀어 가는 길을 놓친다. 이 세상에 심포 마을로 파고드는 저 바다를 밀쳐낼 힘이 없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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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온 길로도 충분한데, 그새 욕심이 자라서 나는 잠시라도 이 자리에 멈추고 싶어진다. 멈춘다. 철퍼덕 주저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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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렁길 3코스> 기행문 


<비렁길 4코스> 기행문  


<비렁길 5코스> 기행문


댓글목록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

비렁길 4코스는 미리내님과 요산요수(쏨뱅이)님의
인터뷰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올리지 못한 사진들은 시나브로 올리겠습니다.

<span class="guest">미리</span>님의 댓글

미리 작성일

작은 강정 큰강정 그 다음이
따숩은 따순기미(온금동)그리고 다음이 굴을 연결하는 출렁다리 그리고 멀리 노랑바구 몽돌 해변이지요^^
단숨에 읽었습니다.
아래서 두번째 테크길 끝 노랑바구 반도로 꺾이는 부분 바다해변엔 깨끗하고 맛있는 파래가 설 무렵이면 잔뜩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네요 가 본지 40년하고도 더 지나서 강산이 네번 이상 변했을터이니 거기도 같을 수는 없겠지만요.

이제 막개를 향한 5코스는 저번에 섬 방풍 우유 올렸다고 통과하나요?
한숨 쉬고 다시 자세히 올리봐봐요.

미리내 아이디를 보고 예전에 밤 늦게 번팅하신분이 밥 먹고 미리내는 밥값 미리 내라 해서 미리 내기 싫어 뒤 글자를 생략해불고 ~~하였든 그렀습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파래 이야기도 있었는데
글이 너무 길어 몇 군데 삭제했습니다
언니의 많은 정보 덕분에
알지 못한 비렁길 4코스를
제 나름대로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무지 바쁜 3월을 만나게 되었지만
귀하게 만난 비렁길 5코스 이야기도
풀어내야지요 ㅎㅎ
저는 그래도 미리내님이 더 좋아요~♡
오늘 너무 바쁘게 볼 일이 있어
이제 귀가했네요
좋은 꿈 꾸세요~♡

<span class="guest">선우향</span>님의 댓글

선우향 작성일

비령길4코스가 사진과 글에 고스란히 담겨있네요.
함께 걷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좋은 곳 글과 함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아유~오랜만에 오셨네요.
밀린 숙제를 후딱 한 느낌이네요 ㅎ
선우향님 자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렁길 1코스에서 5코스까지
다 돌아 보았는데요.
1,2코스는 다시 가려고 합니다.
혹시 동행할 생각 있으면
체력 보강하시고
제 곤지 손가락 잡아주세요~ㅎ

산벚나무님의 댓글

산벚나무 작성일

학동->이장자리(끝자리)->영수밭밑->사다리통전망대->줄맨데->부삭바구->작은강정->큰강정(못동해변)->온금동전망대->따순구미->장구골(출렁다리)->웃가람->몽돌해변->노랑바구->심포.
비렁길 4코스 주옥같은 지명 퍼즐이 맞춰졌나요?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산벚나무님, 미리님 도움이 결정적이었어요.
4코스 이어 5 코스도 원초적 지명에 닿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span class="guest">외기러기</span>님의 댓글

외기러기 작성일

4코스 걸어 본지 몇해 지난것 같은데 사진속의 풍경들 여전히 싱싱하게 잘 있군요
번질듯한 푸른색의 바다는 4코스가 자랑하는 마스코트이기도 하구요.^^
나리꽃,,초여름이면 절벽 틈틈이서 주황색 나리꽃이 비단치마 꽃무늬처럼 수를 놓아
낚시하며 올려다보는 눈을 호강시켜 주었죠.
이때쯤이면 절벽 틈틈이서 나리꽃싹이 빼꼼히 돋아날때군요.
오래간만에 만나는 4코스 비렁길 사진과 설명글 너무 좋네요. 늘 파이팅요.^^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동백꽃 다음 순위가 점박이 참나리꽃이지요.
보고 있어도 그리운 꽃들입니다.
나중에 혹시라도 생각나시는 지명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청성머들 이름도 참 고귀합니다. 외기러기님 덕분에 찾았어요.

<span class="guest">초야</span>님의 댓글

초야 작성일

에머랄드는 끼워보지 못했지만 비렁길에서 그 빛에 빠져 보곤 했지요. 어는 날씨 좋은날 비렁에 서면 에머랄드 빛이 먼져 반겨 주지요! 봄 꽃이 피어나는 이 때에 비렁길 숲속에서 내다보는 동백은 비렁의 진수 일진데 전번에 갔을 때에는 추위에 꽃잎이 꼬실라져 안타까웠는데 맘껏 피어나는 동백을 보니 춘심이 맘 속에 가득해 집니다. 바닷물 스치며 동백꽃 지나 시누대 터널의 바닷 바람이 선뜻 스쳐 가네요.
바람도 바다와 동백을 스쳐야 맛깔인데 에머럴드 빛깔까지 함께하니 무릇 봄이 더욱 풍성해 지는 느낌입니다. 봄 맞이 비렁길이 그리워 지는데 님의 탐방이 더불어 컨닝 탐방으로 이어져 곁에서 보는 느낌 입니다. 이번 봄을 비렁길에서 왈츠로 퍼포먼스 한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생각해 봤어요. 새싹 오를때 금오도 한번 가야 하는디 생각 함시렁~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사월의 비렁길도 참 아름답다고 합니다.
다음번에 가실 때는 장지에서 시작해 보세요
거꾸로 가는 비렁길도 너무 멋지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초야님의 모든 여정이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늘 화이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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