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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렁길


금오도 비렁길 1 코스 여행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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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진희 조회 745회 작성일 24-05-1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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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도(金鰲島) 비렁길 여행후기


1. 금오도 비렁길 1코스를 들어가기 전에 (직포---함구미 약 8.5km)

 

(1) 금오열도 알아보기

 

금오도(金鰲島)는 비렁길이 있는 섬으로 여수시 남면(南面)에 속한다.

화태도(禾太島), , 소두라도(, 小斗羅島), 나발도(羅發島), , 소횡간도(, 小橫干島), 금오도(金鰲島), 안도(安島), 연도(鳶島), , 소부도(, 小釜島)를 비롯하여 여러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금오열도(金鰲列島)라고 부른다.

그중 제일 큰 섬인 금오도(金鰲島)의 해안을 따라 급경사와 낭떠러지를 이루는 해식애(海蝕崖 Sea cliff)와 해안단구(海岸段丘 Coastal terrace)를 따라 비렁길이 조성되어 있다.

 

(2) 금오도 역사와 환경

 

금오도(金鰲島)에는 사철 푸른 소나무를 비롯하여 많은 나무가 울창하여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 하여 거무섬이라고 불렀다.

1872년 발행된 순천방답진(順天防踏鎭)”의 지도에는 거마도라고 표시되어 있다.

19세기 후반의 순천부사 김윤식(金允植)이 지은 시를 통해서 금오도를 살펴보면 바다는 가만히 있는 날이 없다고 했다.

초목은 빽빽하고 늘 안개비에 나무는 하늘에 닿았다고 표현했다.

섬에 사는 동물이나 곤충으로는 개구리, 방개, 박쥐, 사슴, 두견새, 모기, 검은 조개가 있었으며, 전복을 따는 사람이 있었고 나무가 많고 사슴이 뛰어 논다고 썼다.

(궁중에서 사슴을 풀어놓고 키웠다)

모기는 지독하다고 하여 당시 금오도의 자연환경(自然環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금오도는 하늘에선 흰 구름이 놀고 파랗게 눈이 시린 바다 위로 사정없이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상괭이가 뛰는 남해안에서도 보기 드물게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금오도의 마을이름이나 섬 이름은 정감이 간다.

이유를 살펴보니 자연현상에 따른 지형과 위치는 물론이고 경승이나 동, 식물, 민속과 인물에 바탕을 둔 이름이 많아 쉬우면서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2. 비렁길 제1코스로 들어가면서

 

(1) 직포의 방풍림

 

일행들이 짐을 추스르고 화양면 세포항구(知人의 배를 이용함)를 출발하였다.

비렁길을 걷는다는 설레는 마음에 수다도 떨어보지도 못했는데 배는 금오도의 직포(織浦) 항구에 도착한다며 길게 기적을 울렸다.

직포(織浦) 마을의 뒷목을 이루는 대대산(大代山, 매봉산)의 줄기를 타고 내려온 옥녀의 치맛자락인 옥녀봉과 다사랑산이 마을 뒤로 얼굴을 살짝 내밀면서 작은 집들이 소나무 방풍림 사이에 감추어 논 듯 숨어 있었다.

이곳 등천(약간의 비탈길)의 소나무 방풍림은 1835년 개도에서 2 가구가 몰래(황장봉산이기 때문에) 들어와 살면서 심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거의 200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제일 큰 소나무의 흉고가 약 400cm나 되었고, 지형상 방풍림을 심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소나무가 주종인 방풍림 사이로 마을을 조금 비껴선 언덕에는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숲 사이로 황장봉산이었을 당시의 위용을 자랑이나 하듯 소나무가 하늘을 덮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2) 비렁길의 지형

 

직포(織浦, 보대)를 지나 해식애(海蝕崖)가 발달하여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굴등 전망대에서 또는 걷게 될 비렁길에서 해안단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용두(龍頭)바위, 미역널바위, 신선대를 찾아볼 수 있다.

***해안단구(海岸段丘 Coastal terrace)란 바다 물속에 있던 기반암(基般巖=겉흙의 아래에 놓여 있는 굳은 암석), ****해식대(海蝕臺), 퇴적지형이 해수면의 하강 또는 지반 융기로 현재의 수면보다 높은 위치의 육지에 남아있는 지형을 말한다.

금오도에서는 해안침식, 퇴적지형, *****해식애(海蝕崖), 씨아치(Sea arch)등 다양한 침식지형을 볼 수가 있다.

해식애에 의한 해식동굴로는 코굴과 보물로 지정된 솔팽이굴, 씨아치(Sea arch) 형상으로는 코끼리바위가 볼거리로 해상관광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3) 황장봉산

 

금오도가 봉산(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던 산)이었을 때 경차관(敬差官=조선시대 지방에 파견하여 임시로 일을 보게 하던 벼슬로 주로 전곡(田穀)의 손실을 조사하고 민정을 살피는 일을 하는 벼슬) 산하 포수였던 박정안(1885)이 처음 들어와 살았다 하여 첫개(初浦)라고 불렀던 두포(斗浦)의 초입에 **불무골이 있다.

경복궁을 재건할 때 나무를 베어내는 연장을 만들었던 대장간(풀무간)이 있었던 곳이라서 불무골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김없이 몰아친 새마을운동(1970년 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대한민국 농촌의 현대화를 위해 시작되어 범국가적으로 시행되었던 운동)은 금오도의 비렁길을 비껴가지 못했다.

마을 안길을 넓히면서 대장간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어졌으나 대장간에서 사용하였던 샘()만 덩그러니 황장봉산의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4) 두포 마을의 유래

 

옥녀봉의 전설에 의하면 옥녀봉에 살던 선녀인 옥녀가 상거리()에서 딴 뽕잎을 이용해 누에를 쳤다.

누에고치가 말(1=10=10)로 잴 정도로 많이 생산되었다.

당시의 상거래 방식은 물물교환이었으므로, 모하(母賀)마을에서 생산된 곡식과 교환하기 위해(정읍 두승산의 유래와 비슷함) 좀 더 큰 도량형()을 만들어 두포(斗浦)라고 했다.

모하(母賀)마을의 유래를 보면 목화(木花)가 잘 되었던 곳으로 목화동(木花洞)”이라고 불렸다.

어머니가 옷을 만들기 위해 하는 일이 길쌈이어서 누에고치와 목화가 상징하는 모() 자와 옷이 귀하던 시절에 자식에게 의복을 입혀줌이 경사스러워 하() 자를 써 모하(母賀)라고 불렀다고 한다.

두포마을의 유래에서 모하마을이 곡창지대였다는 것으로 두포를 설명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억지스러워 보였다.

 

(5) 비렁길의 탄생

 

비렁길은 섬이 많아 아름답기로 유명한 남해안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해안단구의 *벼랑길(낭떠러지의 험한 언덕)을 따라 조성되었기 때문에 여수의 사투리인 비렁길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깎아지른 절벽과 쪽빛바다와 푸른 하늘이 어울려도 아름답다.

또 이곳에 적당하게 낀 해무와 어울려 장관을 이루는 섬과 벌겋게 타는 저녁노을이 100m나 되는 절벽에 걸쳐 대롱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숨조차 쉴 수가 없다.

푹푹 찌는 한 여름에도 온갖 나무들이 잎이라도 파르르 떨어주면 금방이라도 진한 초록이 어깨로 내려올 것 같은 상그런 숲길을 걷는 맛은 전국의 어떤 다른 숲길보다 더 오랫동안 긴 여운을 남길 것이다.

비렁길은 산행과 함께 걷는 길을 온갖 체험을 할 수 있는 길이다.

또 다도해를 조망할 수 있는 매봉산(대대산 大代山, 대부산)에서 보이는 섬들의 옛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 곳이다.

끝도 없이 하늘에 걸린 비렁길을 따라 옛사람들이 땔감을 구하기 위해 천길 벼랑 위로 난 한 뼘도 못 되었을 길을 따라 나뭇짐을 지고 힘들게 뒤뚱거리며 지나갔을 것이다.

비렁길이 가지고 있는 고단한 삶의 일상을 뒤돌아보는 것도 결혼하기 위해 설레며 지나갔을 신랑신부 이야기와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지나갔을 비렁길 위에서 길의 문화를 찾아보는 것도 길을 걷는 재미라고 생각한다.

 

(6) 비렁길의 식물

 

비렁길을 따라 펼쳐지는 천애절벽 위에서는 호연지기를 기르고, 원시림 속에서는 다양한 식생을 엿볼 수가 있는 귀중한 시간과 장소를 제공해 준다.

비렁길은 자연학습관 또는 환경체험교실로도 손색이 없다.

비렁길 중간중간에 툭 터진 조망은 물론이고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제법 모양새를 풍기는 억새밭도 펼쳐진다.

이순신 장군이 화살을 만들었다는 신이대(이대. 신우대)가 대 숲을 이루고 동백나무, 천선과나무, 머귀나무, 비자나무, 참식나무, 후박나무, 굴피나무, 참느릅나무, 누리장나무, 예덕나무, 병풍, 송악, 모람, 마삭줄, 멀꿀, 인동덩굴, 방기, 세모래덩굴, 절국대, 콩짜개덩굴, 무릇, 맥문동을 비롯하여 온갖 나무와 야생초가 갈 길을 막아서는 곳이다.

스핑크스의 전설처럼 이름을 부르게 하고, 바닷물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물수리는 큰 눈을 껌뻑이며 비렁길의 지킴이처럼 머리 위를 뱅뱅 돈다.

 

(7) 초분

 

매봉산을 대대산, 대부산이라고 부르는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을 지나 언덕길을 조금 걸으면 초분이 나온다.

비렁길에서 요즘 보기 드문 초분을 볼 수 있는데 여수시청의 자료에 의하면 ******초분(草墳)이란 우리나라 장례방식의 하나로 일종의 풍장에 속한다.

남서해안을 따라 해안이나 섬에서 송장을 짚이나 풀로 덮어 두었다가 육탈(3~10)이 된 후 뼈를 골라 깨끗하게 씻어(씻골) 매장하는 장례방식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비렁길의 초분은 실제 초분이 있었던 자리에 재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초분이라는 장례방식을 선택한 적절하고 합당한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성행했던 장례방식이 사라지게 된 이유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였을 때 일본 군인이나 순사(경찰)를 초분 속에 숨어 있다 공격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자 일본이 강제적으로 막았고, 기존에 있던 초분도 없애버리면서 급격하게 장례문화가 사라졌다.

다른 이유로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 초분이 장례비를 이중으로 지출하는 허례허식의 일환으로 규제하기 시작했다.

우리 고유의 민속을 미신적인 신앙과 깨끗하지 못한 장례제도로 여기면서 금지시키자 지금은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8) 금오도의 불교문화

 

멀리 있는 여러 섬들을 눈으로 구경하며 싸목싸목 걸었다.

숲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제법 널따란 곳에서 숲 속의 새소리와 견줄만한 오카리나 연주를 듣고 나니 몸은 벌써 신선이 머문 109m 벼랑 끝 하늘에 대롱대는 신선대에 와 있었다.

조금 지나다 보면 미역널방이 있는데, 주민들이 채취한 미역을 널어 말렸다 하여 부르게 되었다.

육지의 빨래터처럼 한()과 해학과 여인들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사방에서 두런대는 곳이다.

수달피벼랑은 넓은 바위에 수달이 자주 모여 놀았다 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사람의 흔적이 사방에 그득하며 넓은 평지가 나오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절터라고 한다.

대나무가 숲을 이룬 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 전설에 따르면 이곳은 쓸모없이 험한 산악지역이었다.

보조국사가 지팡이로 두드려 평지를 만든 다음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공양 쌀을 씻던 상좌아이가 실수로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자 다시 지팡이를 두드려 산을 무너지게 하여 절의 흔적을 없애고 떠나 버렸다.

상좌아이가 쌀을 씻던 자리에 지금도 쌀뜨물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 찾아보는 것도 비렁길을 걷는 묘미를 살리는 것이다.

전설에 많이 나오는 지팡이의 유력한 힘은 나무와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은 남근의 상징으로 신앙시 되었고, 뚫고 들어가는 힘을 상징하고 병마를 쫓고 생명을 원상대로 복귀하는 창생력(創生力)을 가진 것으로 여겼다.

이런 민속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 절터의 전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절터는 송광사라는 절로 고려시대 보조국사(지눌)가 창건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화순 모후산(母侯山)에서 좋은 절터를 찾기 위해 나무로 깎은 새를 날려 보냈다. 한 마리는 순천 송광사 국사전 터에, 다른 한 마리는 고흥 금산면 송광암에, 나머지 한 마리는 금오도에 앉았다고 한다.

지눌이 고려 명종 25(1195)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송광사라고 했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새가 앉은자리에 세운 3개의 절을 삼송광(三松廣)이라고 한다.

송광사의 절터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세울 때 함구미(옛 용두)의 소나무를 이용했다.

이때 비사리나무 한 그루를 순천 송광사로 가져가 구시(구유=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 흔히 큰 나무토막이나 큰 돌을 길쭉하게 파내어 만듦. 송광사의 구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을 공양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구시에 식지 않도록 담았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순천 송광사에 있는 오래된 구시는 남원에서 가져온 비사리로 만든 것이라고 하니 절터 근처나 함구미(含九味)에서 혹시나 있을 비사리나무를 찾아보는 것도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9) 함구미와 송고

 

비렁길 1코스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함구미(含九味)는 한구미(구미=바닷가나 강가의 곶이 길게 뻗다 후미지게 휘어진 곳, 우리 동네에서는굽이의 잘못인 구비라고 함)라고 부른다.

매봉산 산줄기 끝부분이 용머리를 닮았다 하여 용두라고 부르다 바닷가의 해식애가 기암절벽을 이루며 아홉 개의 골짜기 모양을 나타내고 있어 함구미(含九味, 한구미)라고 부르게 되었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을 한 바위가 있는데 어떤 주민이 여의주에 해당하는 바위를 빼내어 바다로 굴려 버렸다.

그해부터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나가자, 이것은 여의주를 훼손한 죄 값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이 제사를 지내어 달래고 나자 마을이 평온을 되찾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용두(龍頭)바위가 있다.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를 따르면 이곳의 절벽에서 배를 깔고 업어져 상어를 잡았던 재미있던 시절이 있었다며 허허 웃는 웃음소리를 뒤로했다.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고 마시면 잔병은 물론 사내아이를 못 나는 사람이 사내아이도 낳을 수도 있다는 기적의 샘으로 향했다.

함구미(含九味)에는 제주도에서 본 돌담처럼 매우 높게 쌓은 담이 있다.

이것은 태풍으로 인해 바닷물이 날아오는 것과 강한 바람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함구미마을 옆에는 멸치가 맛있기로 소문이 난 송고(松高, 솔고지)라는 마을이 있다.

키가 큰 소나무가 울창하였다는 것을 마을 이름에서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송고마을은 1879년 소라면 달천에 살던 사람이 조정의 명을 받고 사슴사냥을 왔다 경치에 반해 눌러앉아 살게 되었다고 한다.

소나무가 우거져 솔고지(고지=제주도의 방언으로 숲이또는 ” )이라 부르다 송고(松高)로 변했다고 한다.

 

(10) 거북선을 만든 나무 찾아보기

 

금오도 비렁길의 1코스를 걸으면서 온갖 야생초와 나무는 물론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난대수종을 깊이 있게 찾아볼 수가 있다.

남부해안 지방이 아니면 볼 수가 없는 참나무 종류와 해안에 자라는 야생화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를 더하는 여행이 된다.

금오도에 자라는 나무로 이순신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을 때 많이 사용되었던 나무를 찾아보는 이색체험을 하는 것도 꽤 그럴듯한 여행이 아닐까?. 한다.

배밑판, 멍에, 방패판, , 개판, 삼판(외판)을 만들었던 소나무, 비자나무, 굴피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나무못을 만든 녹나무, 산뽕나무, 가룡목으로 사용한 가시나무, 키를 만든 조록나무을 찾아보면서 숲길을 시나브로 걷는 것도 금오도 비렁길을 오롯하게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맛이라고 생각한다.

 

(11) 나가면서, 길이 곧 문화다

 

길을 걸을 때는 욕심은 비워두고 좋은 품성만 꺼내놓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걸어야 길의 문화를 바로 알고 걷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렁길을 걷는 동안에 사람 사는 동네의 구멍가게를 조금 손질하여 옛날 나무꾼이나 길손이 먹었을 것 같은 음식이나 텁텁하고 토속적인 막걸리 한 잔에 덤으로 비렁길 이야기를 파는 문화가 공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상업적이지 않으면서 비렁길을 가장 잘 아는 마을 사람들의 옛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지역주민과 소통하고 배려할 때 비로소 나눔의 문화가 자연적으로 생기게 되지 않을까?. 한다.

사람들이 길 위로 모여드는 것은 상업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색다른 문화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다.

그들이 바라는 문화를 이어주지 못하는 길이 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지역에서 가장 토속적인 것이 바로 소통하는 것이고 문화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그 길에서 토속적인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순하게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음식에 담긴 문화를 먹는다는 것과 같다.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고 배려하고 나눔으로써 비렁길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비렁길을 통해 길 위를 걷는 사람과 원래부터 살고 있었던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누어야 한다.

가까운 곳의 사람이 즐거워야 멀리 있는 사람도 찾아온다(近者說, 遠者來)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렁길은 걸으면서 보는 생태문화체험의 시작이 아닐까?. 한다.

또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길 위에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문화의 흔적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할아버지의 그 할아버지가 걸어갔을 흔적을 따라 나란히 걷고 있다는 것은 옛 흔적 위에 또 다른 나의 흔적을 더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순천 송광사 구시는 1724년 남원시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비사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지자 가져다 구시를 만들었다고 한다.

4000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의 밥을 담을 수가 있어 당시 절의 크기를 갸름해 볼 수 있는 단초가 된다.

 

*. 벼랑길--낭떠러지의 험한 언덕, 물가의 위험스러운 절벽=벼루, 이런 곳에 난 길을 벼룻길, 높은벼랑=나픈별, 돌벼랑=독별, 기타 사투리로는 빌()에서 나온 벼랑으로 베랑, 베랑체, 베렝이, 비렁이, 비량, 벼락, 베락체, 비럭, 비룩, 비슷한 말로 비탈, 비탁, 비알 등이 있다.

 

**. 불무골--불무골짜기, 불무=풀무의 옛말, 풀무(불을 피우기 위해 바람을 내는 도구)의 사투리.

 

***. 해안단구(海岸段丘) 해안선을 따라 계단 모양으로 나타나는 지형. 해식대나 퇴적면 따위의 해성(海性) 평탄면의 지반이 간헐적으로 융기함에 따라 해면으로 올라옴으로써 이루어진다.

 

****. 해식대(海蝕臺) 해식에 의하여 해안선이 물러나면서 그 앞면의 해면 가까이에 생긴 평탄한 지형. 만조 때는 수면 아래로 잠기나 간조 때는 해면 가까이로 솟아오른다.

 

*****. 해식애(海蝕崖) 해식과 풍화 작용에 의하여 해안에 생긴 낭떠러지.

 

******. 초분(草墳)은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 일정 기간 짚으로 만든 가묘(假墓)를 만드는 장례법으로 다른 나라의 풍장과 비슷하다.

우리나라의 남서해안과 일부 내륙지방에서 행하던 장례풍속의 하나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초빈(初殯), 가빈(家殯), 초장(草葬), 외빈(外殯), 소골장(掃骨葬), 최빈, 덕대초분, 떡달 등 지방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초분은 시신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돌이나 통나무 위에 관을 얹고 육탈(肉脫)이 될 때까지 이엉과 용마름 등으로 덮은 초가집 형태의 임시 무덤을 말한다.

땅 위에 통나무나 구들장을 놓고 솔가지를 깔고 관을 놓은 다음 흙으로 봉분을 만드는 방법도 초분의 일종으로 구토롱이란 장례방식이다.

초분의 형태는 평지장(平地葬)이라고도 부르는 뉘움초분, 돌을 쌓고 시신을 올려두는 고임초분, 초분에서 육탈 된 뒤에 특별한 사정으로 유골을 매장하지 않고 백지에 싸서 대석작이나 종이상자 혹은 비닐포대에 넣고 새끼나 노끈으로 동여매는 세움초분이 있다.

 

*. 기타: 여수시청과 남면의 자료를 일부 인용

**. 국립민속박물관초분의 자료를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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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

너무 소중한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밤에 다시 들어와 답글 올리겠습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

직포 마을에서부터 비렁길을 걸으셨다면 

2코스 1코스를 완주하셨나 보네요. 

오랜 문헌자료가 많은 역할을 해주고는 있지만 

비렁길은 역시 그곳에서 살아낸 분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이어질 때 

더 환한 빛을 발할 수 있지요. 

그런 마음으로 박진희 님께서 언급하신 

주막의 주인장은 

정말 비렁길의 안팎을 전할 수 있는 분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비렁길 여행기 기행문을 쓰기 위해 

다양한 분들과 인터뷰하면서 

비렁길의 맥은 역시나 그곳을 

잘 아시는 분들의 이야기가 밖으로 나올 때 

힘차게 뛴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금오열도 홈페이지 속에 저장된 

다양한 비렁길 속으로 들어오심을 

가슴깊이 환영합니다. 

너무나 소중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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