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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렁길


<비렁길1-1>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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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종희 조회 333회 작성일 24-05-16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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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렁길 1코스에는 참 다양한 원초적 지명이 많은데, 용머리에서 초포마을까지 바닷가 쪽에는 등대, 용굴, 미륵바위(흔들바위),도장바위,하벽강,미역널방전망대,뜨물통,수달피끝(수달피전망대),절터,바깥진거름,안진거름,너무깨통,노들바위(야외음악당 무대),십장굴(아홉굴),가시골,지금널,신선대,핑너브,부삭강정(부삭깡생이),큰난라리,작은난라리,얼금이등,진가람,원시통,양지폴,산나리가 있고


벼랑위로는 용머리 마을, 띠밭너머, 미역널방(전망대), 보습골, 지눌암(수달피전망대), 송광사절터, 노루바위, 함구미윗길, 초분자리, 가시골 다랑논, 신선대전망대, 양지폴, 양지계곡, 시누대 터널, 분무골, 초포마을로 이어진다. 


비렁길 1코스는 유서 깊은 장소도 많고, 다양한 문헌 자료나 여행기에 잘 설명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쉽게 만날 수 있지만, 비렁길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의 공기를 마음껏 마셔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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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은 9년 전에 친구들과 한번 걸어 본 길이다. 출발할 때는 친구들의 푸른 시절을 듬뿍 담겠다는 생각이 앞섰는데, 내 앨범 방엔 비렁길 사진도 만만치 않았다. 경치 좋은 자리에서 내 이름을 줄기차게 부르던 친구들이, 풍경에 정신 팔려 시야에서 벗어난 나를, 빠르게 포기해 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사진은 어쩌다 한 번 지난 추억을 뒤적이게 할 뿐, 비렁길 안쪽을 자세히 풀게 하지는 못했다. 그런 미련이 다시 비렁길로 향하게 했지만, 숨 가쁜 일상에서 얻지 못한 쉼표는, 미리 자료를 살펴보는 시간을 놓치게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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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개불알꽃


함구미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높다란 돌담에서 이제 막 연두를 스친 담쟁이가 반긴다. 경사진 작은 오솔길에 접어들어, 그물망 울타리를 스치는 사이, 푸른 아치터널은 느슨하게 자세를 풀어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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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나무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도 사이좋은 밀담이 오갔는지, 나무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터널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비집고 올라갈 수 없었을까. 나무 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몸을 축 늘어뜨리던 청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아쉬움에 두 눈을 반짝이는데, 저만치 보랏빛 골무꽃이 방긋하다. 이럴 때는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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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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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향기에 취해 걷다 보면 초록이 터널을 이루어, 어느 방향에서든 내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 간간이 스며든 햇살이 없었다면, 초록에 갇힌 신세나 마찬가지다. 이런 음습한 기운에 매몰될까 봐, 숲은 가끔씩 한쪽으로 몸을 비틀어 바깥을 들어앉게 하는 것이다. 갑자기 숲으로 들어온 볕은 이내 지루할 틈을 놓치는데, 터널 천장을 빼곡히 채운 소사나무 이파리처럼 나무 밑둥치에 다닥다닥 붙은 콩짜개란이 눈에 들어온다. 앙증맞은 초록 동그라미에게 급하게 마음을 주고 나니, 여기저기 제 존재감을 알리느라 부산하다. 마치 제주도 에코랜드 숲에 내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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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짜개란


관상용 가치가 높아, 이미 일부 개채군은 소멸하여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이라는 콩짜개란이 정말 맞나 싶어 내 눈을 의심한다. 모나고 보잘것없는 돌도, 오랜 세월 미동 없던 바위도, 욕심껏 가지를 늘린 잡목도, 소신껏 제자리를 지킨 덕분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참신한 작품으로 거듭났다.


평소에 목부작을 좋아해서 괴목에다가 석곡, 풍난, 콩짜개란을 착상시켜 키우고 있는데, 이네들은 통풍과 물을 좋아해서 자주 물 스프레이를 해줘야 한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저 투박한 바위나 잔가지에서도  잘도 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은, 울창한 숲이 살기 좋은 집을 만들고,  흠뻑 노닐던 해무가 일용한 양식을 제공한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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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비와 어름덩쿨


다시 열린 하늘가로 아직 연두 중인 감나무 잎이 들어오고, 초록 벽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벽은 아무 생각 없는 나의 걸음을 왼쪽 방향으로 틀게 하고, 돌계단으로 안내한다. 무심코 오르다가 다시 내려와 초록 담과 담 사이 좁은 여백을 본다. 그 형태가 꼭 새랍 같아 자세히 보니, 하마터면 놓칠 뻔한 집터다. 으름넝쿨이 보이고, 안쪽을 가득 채운 대나무가 보인다. 9년 전에 보았던 시멘트 벽과 큰 항아리는 흔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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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삭줄


순간, 바로 여기가 용의 머리를 닮아 얻은 이름, 용머리 마을이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잘 알지 못하면서 그리움부터 배워, 꼭 한 번 자세히 걸어보고 싶었던, 그녀의 동백아치 터널을 지나온 것이다. 어쩌면 저 안쪽 어딘가에는 꿈에서도 만나고 싶은, 그녀의 서정이 박제되어 사람의 온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점박이 나리 꽃 사연이 꿈결처럼 몽롱한 의식을 채우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내 마음도 무색하게 대나무는 빈집이라는 틈을 조금이라도 보일라치면, 입주를 서둘러 너무도 당당한 터줏대감 행세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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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머리 마을 돌계단


집터를 뒤로하고 오른 돌계단 주변도 온통 대나무 도열이다. 막다른 골목처럼 높다란 돌담이 다시 길의 방향을 틀어놓는다. 돌담아래에서는 어렴풋하게 보이던 슬레이트 지붕이, 묵직하게 몸집을 키운 아이비에게 반쯤 주저앉혀 있는 것을, 돌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알 수 있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고 터널 입구에서 다시 뒤를 돌아본다. 한때는 왁자했던 웃음이 애잔하게 고인다. 잘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떼는데, 우람한 비자나무 두 그루가 온통 콩짜개란 옷을 입고 아득하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서러운 날들은 뜻밖의 풍경에 길을 잃고 저물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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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자나무와 콩짜개란


좀 전의 그늘은 사라지고, 나는 이 나무들에게 온통 마음을 뺏겨 한숨 같은 탄식만 연발한다. 문득 생각난다. 9년 전 억새밭을 가르며 땡볕에 빨갛게 달아오르던 기억을... 띠밭너머를 장악했던 억새가 보이지 않는다. 억새 너머로 환하게 다가오던 바다와 섬마저 초록 담장에 밀려 흐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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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밭너머)라는 지명을 잠식한 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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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잠식해도 너무 예쁜 넝쿨식물들의 끝없는 환영을 받으며, 노송과 테크 난간을 스친다. 그때서야 겨우 바다가 보이고 나로도가 보인다. 초행길인 양 모든 길은 새삼스럽고 싱그럽다. 예상치 못한 반전 드라마 같은 풍경이 내 걸음의 속도를 늦추는데, 어느새 흙이 사라진 바위다. 낡은 데크 난간이 오랜 세월을 들킨 것처럼 생소한데, 삐죽 솟구친 녹슨 조형물은 여기가 그 유명한 미역널방이라고 귀띔한다. 미역을 널었던 곳이라 미역널방이라는 지명을 얻었다는데, 말로만 듣던 그 아찔한 스릴이 궁금하여  난간 끝에서 바다를 내려다본다. 순간 발바닥이 간지러워 보습골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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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금열매


저 단단한 바위를 파랑이 어떻게 깎아냈을까...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무리  셔터를 눌러도 성에 차지 않는 장면만 화면을 채우는데, 발아래 까만 열매가 가득이다. 정금이다. 내 환호가 아무리 밖으로 나가도, 지금 미역널방에 있는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한 알 깨물자 입안 가득 달콤한 블루베리 맛이 번진다. 풍경부터 채우고 따먹겠다는 내 의지는, 수달피 전망대로 향하는 잔교 위에서 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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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기구 (보습)을 닮아 보습골이라는 지명을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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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습골로 향하는 잔교에서 바라본 미역널방


미역널방에서는 보습골의 매력에 빠졌다면, 보습골 잔교 위에서는 미역널방에 빠진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으로 상대를 보고, 그 가치로 서로를 그리워하는 까닭이다 . 그렇게 나의 가치가 상대의 마음으로 측정 된다 할지라도 내 본연의 가치를 상대에게 의지할 필요는 없다고, 미역널방과 보습골은 너무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그 말에 나도 동의한다는 생각을 이제 막 하고 있는데, 어떤 아낙이 내 등을 스치면서 한마디 던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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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아무리 자주 와도 질리지 않아”



<계속>



 

댓글목록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

대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앉은 빈집터

9년 전 사진입니다.




 

이종희님의 댓글

이종희 작성일

함구미에서 미역널방까지

보다 많은 사진은 [사진게시판]에 올려두었습니다~^^

<span class="guest">요산</span>님의 댓글

요산 작성일

Good ^^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요산요수님 

1코스 바닷가 지명

제가 며칠 지천?도 듣고 손가락 품도 팔아

저렇게 많이 찾아냈는데

혹시 제가 아직 찾지 못한 지명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보습골 지명

그 유례를 아시면 깜짝 놀랄걸요

정말 자세히 보면 그것을 닮았습니다.ㅎ


<span class="guest">요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요산 작성일

세밀하게 잘 정리 하셨네요. 

난 그 동네에 대해선 애린님보다 몰라요.^^


공자님 가라사되,,

아는것은 안다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는것이 진짜 아는것이다.^^

아시겠져? ㅎ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공자님 말씀을 잘 이해하신 때문인지...

꽃밭등 주변은

너무 잘 알고 계신 요산요수님께서 

풀어 주셔야겠어요 ㅎ



 

<span class="guest">미리</span>님의 댓글

미리 작성일

항아리 집 ?

대나무로 가득이군요

마당에 시멘트 포장되어 괜찮은 줄 알았는데 침입하고 말았군요.

요수님과 애린님 때문에

나가서 블루베리한 통 사 와서 

먹습니다.

정금 맛까지는 아니지만 아쉬운대로 

입안에 들어 간 량은 많으니 위안이 됩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눈 앞에 정금이 두고 겨우 한 알 밖에 

못 따먹고 와서 후회 막심입니다 ㅎㅎ

그러고보니 대나무가 시멘트 바닥을 

뚫었네요.

참 무서운 녀석들 입니다.

얼음 넝쿨도 여전하데요...

항아리집 얼음넝쿨쪽  바깥 돌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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