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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렁길


<비렁길 1>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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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종희 조회 628회 작성일 24-05-16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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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렁길1-1) 


비렁길 1코스는 유서 깊은 장소도 많고, 다양한 문헌 자료나 여행기에 잘 설명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쉽게 만날 수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래도 비렁길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의 공기를 마음껏 마셔보는 것이다.

 

비렁길 1코스에는 참 다양한 원초적 지명이 많은데, 용머리에서 초포마을까지 바닷가 쪽에는 등대, 용굴, 미륵바위, 도장바위, 하벽강, 미역널방전망대, 뜨물통, 수달피끝(수달피전망대), 절터, 바깥진거름 ,안진거름, 너무깨통, 노들바위(야외음악당 무대), 십장굴(아홉굴), 가시골, 지금널, 신선대, 핑너브, 부삭강정(부삭깡생이), 큰난라리, 작은난라리, 얼금이등, 진가람, 원시통, 양지폴, 산나리가 있고,


벼랑위로는 용머리 마을, 띠밭너머, 미역널방(전망대), 보습골, 지눌암(수달피전망대), 송광사절터, 노루바위, 함구미윗길, 초분자리, 가시골 다랑논, 신선대전망대, 양지폴, 산나리계곡, 시누대 터널, 분무골, 초포마을로 이어진다.

 

이 길은 9년 전에 친구들과 한번 걸어 본 길이다. 출발할 때는 친구들의 푸른 시절을 듬뿍 담겠다는 생각이 앞섰는데, 내 앨범 방엔 비렁길 사진도 만만치 않았다. 경치 좋은 자리에서 내 이름을 줄기차게 부르던 친구들이, 풍경에 정신 팔려 시야에서 벗어난 나를, 빠르게 포기해 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사진은 어쩌다 한 번 지난 추억을 뒤적이게 할 뿐, 비렁길 안쪽을 자세히 풀게 하지는 못했다. 그런 미련이 다시 비렁길로 향하게 했지만, 숨 가쁜 일상에서 얻지 못한 쉼표는, 미리 자료를 살펴보는 시간을 놓치게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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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렁길 1코스 초입에 있는 담쟁이와 돌담 


함구미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높다란 돌담에서 이제 막 연두를 스친 담쟁이가 반긴다. 경사진 작은 오솔길에 접어들어, 그물망 울타리를 스치는 사이, 푸른 아치터널은 느슨하게 자세를 풀어 반긴다.


다양한 나무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도 사이좋은 밀담이 오갔는지, 나무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터널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비집고 올라갈 수 없었을까. 나무 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몸을 축 늘어뜨리던 청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아쉬움에 두 눈을 반짝이는데, 저만치 보랏빛 골무꽃이 방긋하다. 이럴 때는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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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향기에 취해 걷다 보면 초록이 터널을 이루어, 어느 방향에서든 내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 간간이 스며든 햇살이 없었다면, 초록에 갇힌 신세나 마찬가지다. 이런 음습한 기운에 매몰될까 봐, 숲은 가끔씩 한쪽으로 몸을 비틀어 바깥을 들어앉게 하는 것이다. 갑자기 숲으로 들어온 볕은 이내 지루할 틈을 놓치는데, 터널 천장을 빼곡히 채운 소사나무 이파리처럼 나무 밑둥치에 다닥다닥 붙은 콩짜개란이 눈에 들어온다. 앙증맞은 초록 동그라미에게 급하게 마음을 주고 나니, 여기저기 제 존재감을 알리느라 부산하다. 마치 제주도 에코랜드 숲에 내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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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짜개란 


관상용 가치가 높아, 이미 일부 개채군은 소멸하여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이라는 콩짜개란이 정말 맞나 싶어 내 눈을 의심한다. 모나고 보잘것없는 돌도, 오랜 세월 미동 없던 바위도, 욕심껏 가지를 늘린 잡목도, 소신껏 제자리를 지킨 덕분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참신한 작품으로 거듭났다.


평소에 목부작을 좋아해서 괴목에다가 석곡, 풍난, 콩짜개란을 착상시켜 키우고 있는데, 이네들은 통풍과 물을 좋아해서 자주 물 스프레이를 해줘야 한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저 투박한 바위나 잔가지에서도 잘도 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은, 울창한 숲이 살기 좋은 집을 만들고, 흠뻑 노닐던 해무가 일용한 양식을 제공한 까닭일 것이다.


다시 열린 하늘가로 아직 연두 중인 감나무 잎이 들어오고, 초록 벽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벽은 아무 생각 없는 나의 걸음을 왼쪽 방향으로 틀게 하고, 돌계단으로 안내한다. 무심코 오르다가 다시 내려와 초록 담과 담 사이 좁은 여백을 본다. 그 형태가 꼭 새랍 같아 자세히 보니, 하마터면 놓칠 뻔한 집터다. 으름넝쿨이 보이고, 안쪽을 가득 채운 대나무가 보인다. 9년 전에 보았던 시멘트벽과 큰 항아리는 흔적이 없다.


순간, 바로 여기가 용의 머리를 닮아 얻은 이름, 용머리 마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잘 알지 못하면서 그리움부터 배워, 꼭 한 번 자세히 걸어보고 싶었던, 그녀의 동백아치 터널을 지나온 것이다. 어쩌면 저 안쪽 어딘가에는 꿈에서도 만나고 싶은, 그녀의 서정이 박제되어 사람의 온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점박이 나리 꽃 사연이 꿈결처럼 몽롱한 의식을 채우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내 마음도 무색하게 대나무는 빈집이라는 틈을 조금이라도 보일라치면, 입주를 서둘러 너무도 당당한 터줏대감 행세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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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머리 마을 돌계단 


집터를 뒤로하고 오른 돌계단 주변도 온통 대나무 도열이다. 막다른 골목처럼 높다란 돌담이 다시 길의 방향을 틀어놓는다. 돌담아래에서는 어렴풋하게 보이던 슬레이트 지붕이, 묵직하게 몸집을 키운 아이비에게 반쯤 주저앉혀 있는 것을, 돌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알 수 있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고 터널 입구에서 다시 뒤를 돌아본다. 한때는 왁자했던 웃음이 애잔하게 고인다. 잘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떼는데, 우람한 비자나무 두 그루가 온통 콩짜개란 옷을 입고 아득하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서러운 날들은 뜻밖의 풍경에 길을 잃고 저물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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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머리 마을, 대나무 터널, 비자나무와 콩짜개란 


좀 전의 그늘은 사라지고, 나는 이 나무들에게 온통 마음을 뺏겨 한숨 같은 탄식만 연발한다. 문득 생각난다. 9년 전 억새밭을 가르며 땡볕에 빨갛게 달아오르던 기억을... 띠밭너머를 장악했던 억새가 보이지 않는다. 억새 너머로 환하게 다가오던 바다와 섬마저 초록 담장에 밀려 흐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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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잠식해도 너무 예쁜 넝쿨식물들의 끝없는 환영을 받으며, 노송과 테크 난간을 스친다. 그때서야 겨우 바다가 보이고 나로도가 보인다. 초행길인 양 모든 길은 새삼스럽고 싱그럽다. 뜻밖의 반전 드라마 같은 풍경이 내 걸음의 속도를 늦추는데, 어느새 흙이 사라진 바위다. 낡은 데크 난간이 오랜 세월을 들킨 것처럼 생소한데, 삐죽 솟구친 녹슨 조형물은 여기가 그 유명한 미역널방이라고 귀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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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습골 잔교에서 본 미역널방


미역을 널었던 곳이라 미역널방이라는 지명을 얻었다는데, 사실 이곳에는 덩치 큰 흔들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 흔들어 보기도 했는데, 유독 술만 드시면 바위에게 신세 한탄을 하며 바위를 흔들던 한 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바위를 흔들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바위가 힘없이 밀리더니 엄청난 굉음과 함께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심장이 놀랐는지, 자세한 연유는 알 수는 없지만, 얼마 후에 그분도 돌아가셨다고 한다. 힘든 세상살이를 들으며 괴로워하다가 보돌바다에 수장된 바위도, 세속의 괴로움에 절망하던 그분의 이야기도, 아직 다 마르지 않았는데, 말로만 듣던 미역널방의 아찔한 스릴이 궁금하여 나는 난간 끝에서 바다를 내려다본다. 순간 발바닥이 간지러워 보습골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저 단단한 바위를 파랑은 어떻게 깎아냈을까...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무리 셔터를 눌러도 성에 차지 않는 장면만 화면을 채우는데, 발아래 까만 열매가 가득이다. 정금이다. 내 환호가 아무리 밖으로 나가도, 지금 미역널방에 있는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한 알 깨물자 입안 가득 달콤한 블루베리 맛이 번진다. 풍경부터 채우고 따먹겠다는 내 의지는, 수달피 전망대로 향하는 잔교 위에서 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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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기구 (보습)을 닮아 보습골이라는 지명을 얻음 

 

미역널방에서는 보습골의 매력에 빠졌다면, 보습골 잔교 위에서는 미역널방에 빠진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으로 상대를 보고, 그 가치로 서로를 그리워하는 까닭이다 . 그렇게 나의 가치가 상대의 마음으로 측정 된다 할지라도 내 본연의 가치를 상대에게 의지할 필요는 없다고, 미역널방과 보습골은 너무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그 말에 나도 동의한다는 생각을 이제 막 하고 있는데, 어떤 아낙이 내 등을 스치면서 한마디 던지고 간다.

 

“여기는 아무리 자주 와도 질리지 않아



(비렁길1-2)


미역널방과 수달피 전망대 사이 뜨물통에는 하나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매일 하루치의 쌀이 고였다는 뜨물통을, 보조국사의 상좌 아이가 한꺼번에 많은 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욕심에 그곳을 파게 되었다. 아무리 파도 쌀은 나오지 않았고, 얼마 안 가 상좌 아이가 바위에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크게 상심한 보조국사는 처음 절을 만든 지팡이로 절의 흔적을 지우고 떠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상좌아이가 뜨물통을 건들어서 재앙이 따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뜨물통에는 하얀 뜨물이 흐른다고 하는데, 궁금해도 나는 지금 확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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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보습골 잔교는 시간에 밀려 바래지고, 잔교 위로 자라는 잡목들은 자연의 힘을 얻어 푸르다. 앞서간 어르신은 수달피 전망대 팽나무 그늘에 앉아 다리를 펴시는데, 오랜 세월 구부정한 자세를 견딘 팽나무는 데크 바닥이 사라져야 제 밑둥치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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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달피 전망대 울타리 밖의 나무는 보이지 않는 팽나무의 키를 가늠하게 함 


섬 안쪽에서는 끝나는 길이 있고, 섬 바깥에는 끝나지 않는 지명이 있다. 수달피 전망대에서 등대에 이르기까지 바닷가에는 뜨물통, 미역널방, 하벽강, 도장바위, 미륵바위, 용굴등의 원시적 지명을 얻은 해식애와 해식동이 있다.

그중에는 짙은 노을이 황홀한 빛으로 홀로그램을 연출하여 붙여진 이름 하벽강이 있다. 그곳의 다양한 절리 중에는 도장을 찍어둔 듯한 선명한 도장 바위가 있고, 그 위에는 일부러 바위에 선각한 듯한 미륵 형상이 있는데, 지금은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을 스쳐야 하는 저녁노을 마저도 하벽강 앞에만 서면 제 빛을 거두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사람들은 유별난 빛에 매료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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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터 뒤 바위 (용의 눈) 


좀처럼 일어나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어르신께 작별 인사를 하고, 나는 다시 걸음의 속도를 올린다. 아직은 중심에 서지 못한 햇살이 댓잎에 부딪혀 찰랑인다. 줄곧 따라온 새들의 노래는 고르지 못한 나의 호흡을 재우고, 대나무 사이 길은 용의 눈 바위로 시선을 안내한다. 유례 깊은 송광사 절터를 알리는 표지판은 넓은 해안단구의 빈 터를 지키고, 함구미 윗마을로 향한 내 걸음은, 바람마저 관통하기 힘든 동백나무 울타리를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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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숲 밖으로 길게 이어져도 지루할 틈이 없다. 저 멀리 신선대와 굴등, 매봉과 소리도로 연결된 리아스식 해안을 배경으로 유채꽃이 환하고, 발 아래로는 바깥진거름, 안진거름, 너무깨통이라는 든든한 원시적 지명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궁금해도 섬 안쪽에서는 보는 걸 포기해야 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섬 같은 자신을 좀처럼 밖으로 꺼내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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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구미 윗마을 길을 안내하는 노송을 지나고, 전에 보지 못한 비렁길 쉼터를 스친다. 이대로 직행하면 다시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지만,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좁은 길을 따르고, 다시 초록물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삭줄과 아이비는 여기서도 천국이다. 그 사이 어름꽃도 얼굴을 내민다. 이윽고 나는 바위와 나무, 초록과 향기 사이 길을 걸어 초분 자리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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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간의 설에는 아낙들이 초분을 만들어 놓고 먼바다로 고기잡이를 떠난 남자들을 기다렸다고 하고, 객지에서 돌아가신 분들은 고향 땅에 바로 묻힐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직접 아버지를 초분에다가 모셔본 친구 말에 의하면, 땅에 바로 묻을 수 없는 집안 운 때문이었다고 한다. 낮은 돌담을 쌓고, 그 안쪽에 크고 작은 돌을 평평하게 깔아 솔가지를 얹은 다음 관을 놓고, 다시 솔가지와 이엉을 만들어 덮었다고 했다. 그런데 친구는 초분이 비바람에 휩쓸릴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시간이 흘러 다시 장례식을 치르고서야 마음 편하게 아버지를 보내드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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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골에는 90~100개의 다랭이논이 있었음 (돌담 다랭이논 흔적) 


숲의 안쪽 바람은 길을 닮아 유순하고, 돌담은 사람의 흔적을 지우느라 넉넉한데, 갑자기 서늘한 한기가 온몸에 달라붙는다. 그 이름도 서늘한 가시골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서도 온통 콩짜개란을 뒤집어쓴 비자나무가 보인다. 비자나무는 겨울을 염려해서 답답함을 견디는 것일까. 하지만 서로가 공생하는 이유는 일방적이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초포와 함구미의 관계도 그렇다 가시골을 사이로 두고 서로 네 땅, 내 땅 할 것 없이 가시골에 있던 수많은 다랭이 논의 소유주는 함구미 사람들이다.


오랜 날 층층이 돌담을 쌓고 흙을 채워 일궈 논 어여쁜 농토는 흐릿한 흔적만을 남겨두고 초록들에게 거의 넘어갔다. 다시 만나고 싶었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높은 산자락에서 흘러내린 물소리만이 다랭이 논을 채우는데, 자연은 지난한 시절을 모조리 지우려는 듯 무심한 마음을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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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구미 뒤란 바닷가에서 줄곧 이어진, 노들바위(야외음악당)를 지나고, 십장굴(아홉굴), 가시골, 지금널에 이르면, 높다란 해식애 위에는 문씨 성을 가진 분의 집 마당이었다는 해안단구가 나온다. 여수시에서 너무 위험하다고 시에다가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이주를 시켜드렸는데, 얼마 살지 못하고 다시 금오도로 내려오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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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대 전망대의 조망( 예전 문 씨 마당) 


신선대 전망대에 서면 오른쪽으로는 내가 줄곧 걸어온 용머리가 보이고, 앞으로는 나로도 곡두여 무학도, 탕건도, 손죽도, 소거문도, 대암, 소평도, 평도, 구도, 광도, 거문도, 문도, 알마도, 백도, 검등여, 하백도, 납작도가 보인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굴등과 매봉 소리도가 선명하다. 어디 그뿐인가, 보돌바다에 반짝이는 유리알들과 황금빛 주단과 아득한 해무와 구름의 다양한 안색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이 가슴시린 풍경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접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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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집터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작은 대나무 아치 밖 돌계단은 푸른 길을 안내한다. 길은 다시 가느다란 줄기로 바위와 나무를 지탱하고, 나무와 길은 양지폴을 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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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초록사이로 잣밤나무는 제 터를 들키고, 초록에 아슬하게 걸친 슬레이트 지붕에 안도한다. 그리고 숲의 바깥은 오느라 고생했다며 보드라운 미소를 띤다. 하지만 시누대 터널은 아직 끝난 게 아니라며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고, 다음 행선지인 분무골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황장봉산으로 지정되었던 금오도에 개척민이 처음으로 들어와 살았던 첫개(초포)에, 경북궁 재건 나무를 베어내는 연장을 만들 대장간이 들어오면서, 분무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1970년 새마을 운동이 시행되고 마을 안길을 넓히면서 분무골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단다. 하지만 분무골은 언제나 비렁길 1코스 끄트머리에서, 깊고 깊은 제 몸을 투명하게 들어낸 초포를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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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이면 걷는 다는 길을 무려 4시간 동안 서성였다. 끝없이 펼쳐진 초록 물결과 유례를 알 수 없는 선인들의 흔적이 궁금하고, 성큼 제 영역을 늘려버린 생명들의 경이가 비렁길에 가득 고여 차마 걸음의 속도를 올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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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가 끝이라고 하기엔 5월의 초포는 너무 눈이 부시다. 우리도 가야 할 길을 잠시 미루고 주저앉는다. 바다와 들을 단숨에 들이켠다. 몸 안으로 짜릿한 기분이 퍼진다.



감사합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 애쓰셨습니다.



 

<비렁길 1코스> 기행문 


<비렁길 2코스> 기행문  


<비렁길 3코스> 기행문 


<비렁길 4코스> 기행문  


<비렁길 5코스> 기행문


댓글목록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

애린 작성일

대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앉은 빈집터

9년 전 사진입니다.




 

이종희님의 댓글

이종희 작성일

함구미에서 미역널방까지

보다 많은 사진은 [사진게시판]에 올려두었습니다~^^

<span class="guest">요산</span>님의 댓글

요산 작성일

Good ^^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요산요수님 

1코스 바닷가 지명

제가 며칠 지천?도 듣고 손가락 품도 팔아

저렇게 많이 찾아냈는데

혹시 제가 아직 찾지 못한 지명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보습골 지명

그 유례를 아시면 깜짝 놀랄걸요

정말 자세히 보면 그것을 닮았습니다.ㅎ


<span class="guest">요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요산 작성일

세밀하게 잘 정리 하셨네요. 

난 그 동네에 대해선 애린님보다 몰라요.^^


공자님 가라사되,,

아는것은 안다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는것이 진짜 아는것이다.^^

아시겠져? ㅎ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공자님 말씀을 잘 이해하신 때문인지...

꽃밭등 주변은

너무 잘 알고 계신 요산요수님께서 

풀어 주셔야겠어요 ㅎ



<span class="guest">미리</span>님의 댓글

미리 작성일

항아리 집 ?

대나무로 가득이군요

마당에 시멘트 포장되어 괜찮은 줄 알았는데 침입하고 말았군요.

요수님과 애린님 때문에

나가서 블루베리한 통 사 와서 

먹습니다.

정금 맛까지는 아니지만 아쉬운대로 

입안에 들어 간 량은 많으니 위안이 됩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눈 앞에 정금이 두고 겨우 한 알 밖에 

못 따먹고 와서 후회 막심입니다 ㅎㅎ

그러고보니 대나무가 시멘트 바닥을 

뚫었네요.

참 무서운 녀석들 입니다.

얼음 넝쿨도 여전하데요...

항아리집 얼음넝쿨쪽  바깥 돌담입니다.



 


<span class="guest">요수</span>님의 댓글

요수 작성일

다들 기다렸던  2편 글이 나왔군요.^^

1코스 지명과 역사 사연들이 아름다운 문장에 녹아들어

구비구비 멋진 사진으로 승화된듯 좋은 작품을 만드셨네요,

직접 살아보지 않고 경험하지 않고서 이정도 글을 쓸수있는 기량이 놀랍다 하겠습니다.

그런만큼 본인의 노력이 엿보이는 글이기도 합니다.

눈앞에 펼쳐진 해안선 경치가 빼어난 용머리 유채꽃밭은

예전 초여름 이맘때면 이런 풍경이였습니다.

역시 명불허전 멋진 글 잘 보았어요,^^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귀한 사진 감사합니다.

기억으로 가물가물한 고향 이야기를 사진 속에서 만날 때 

반가움은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이미 풀린 사연은 잘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미처 알지 못한 이야기는 

마치 옛 선인들을 만난듯 귀하게 다가옵니다.

그 지역에만, 그것도 기억하는 분이 거의 없는 

미역널방 이야기를 1편에,

2편에는 분무골 이야기를 더 추가했습니다.



<span class="guest">안개</span>님의 댓글

안개 작성일

정성가득한 글과 사진들입니다

4시간동안 1코스 비렁길을 

예리한 애린님의 눈으로 섬세하게 찍어 

보여주시니 감회가 새롭네요.

며칠전 다녀온 비렁길이 눈에 선합니다.

또다른 떨림으로 감상 잘 했습니다.

최고입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비렁길,1,3,4,5 코스를 풀면서

제가 경험하거나 아는 게 없어 

여러분들의 인터뷰와 약간의 사유와 

제가 걸어본 기억으로 풀기는 했지만 

역시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고향홈에 머물렀던 에너지로

비렁길 만은 꼭 풀어보고 싶었습니다.

인터뷰 과정에서

참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span class="guest">향기</span>님의 댓글

향기 작성일

2시간 걸리는 1코스 비렁길을

천천히 자세히 사진찍으시고

관찰 하시느라고 4시간에 걸쳐서

다녀오신 애린님~

아주 세밀한 것 까지 자세히도

기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향기님하고 걸었으면 

딱 좋았을 코스 였습니다.

허락된다면 5시간은 걸어야 

제대로 담아 올 거라는 생각 변함 없습니다. ㅎㅎ

수달피 전망대에서 만난 할아버지가 

젊은 부부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자 분이 


"우린 남이라서 같이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라고 하네요.


그 말에 할아버지는

"우리는 어차피 남이었고 남으로 떠나야 합니다"


<span class="guest">미리</span>님의 댓글

미리 작성일

금오도 동쪽 길은 젊어서 많이도 걸었었지만 서쪽 비렁길은 4코스조차도 옛날엔 조성되지 않아서 낭끄터리 위험한 길이었기에 미지의 세계였었지요

처음 비렁길 조성되고 알려질 때

얼마나 좋던지요.

그리고 걸었어도 세밀한 관찰력의 애린님의 시선은 아니어서 폰 눈 앞에 두고 서서 풍경 찰칵이 전부였는데

앉아 옆으로 비틀어 젖혀 찍고 꼰지발 하고 찍고 허리 숙여 찍는 애린님의 모습이 보여지는 풍경이고

또 이 글을 완성키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모르는 건 전화로 물어가며 썼을 님의 애씀이 그려집니다.


몇 번을 잘 보고 읽습니다.


감사해요.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감사합니다~*


산벚나무님

요산요수님

미리님

제 친구 이학순 

여러분들의 인터뷰가

글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진이 너무 많아 삭제하고

1,2편 한데 모았습니다.

다양한 사진은 사진 게시판에 계속 올려두겠습니다.

산벚나무님의 댓글

산벚나무 작성일

비렁길 1코스는 비렁길 중  가장 테마가 뚜렷한 길이라 생각하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보습골 전경이 아닐까 해요,

[미역널방에서는 보습골의 매력에 빠졌다면, 보습골 잔교 위에서는 미역널방에 빠진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으로 상대를 보고, 그 가치로 서로를 그리워하는 까닭이다 . 그렇게 나의 가치가 상대의 마음으로 측정 된다 할지라도 내 본연의 가치를 상대에게 의지할 필요는 없다고, 미역널방과 보습골은 너무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이 대목은 내면의 갈등을 부단히 녹여내려 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추구하는 철학이 잘 표현되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애쓰셨습니다. 

<span class="guest">애린</span>님의 댓글의 댓글

애린 작성일

감사합니다.

뜨물통에 관한이야기는 

산벚나무님 정보와 문헌의 기록으로

잘 보강했고,

미역널방에 관한 이야기는

현지 분들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흩어지고 말 이야기였습니다.

산벚나무님께서 이번에 

너무 아까운 정보를 넘겨 주셔서

비렁길 1코스 무사히 마무리 지었습니다.

2코스도 거의 마무리 단계인데

마지막 이니 만큼 

제 진술도 더 많이 추가해습니다.

혹시라도 넘겨주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아낌없이 넘겨주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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